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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명량대첩축제..강연회에대한 감상문..전북역사해설사 기고문...
작 성 자 오태규 등록일 2016-06-15 00:00:00.0 조   회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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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명량해전에서.사호공오익창은 어떻한역활을하였는가?.해남유스호스텔.강연장에서내용. 작성자 오태규 등록일 2016-06-15 19:39:42 조 회 1 첨부파일 2012년해남군 명량대첩축제 행사때에..해남유스호스텔강당에서..약800여명의 역사관광해설사와.대첩축제위원들.관광객들을상대로..사호집번역강사.노승석박사.의 명량대첩승리에 대한.역사강연이 있었다..책자발행도 일천부이상 배부되었다..그강연내용에 대한..관광해설사의 기고문을 보시면..사호집책의 내용을 알수있다. .............................................................................................................................................................. 명량대첩에서... 사호공오익창은 ...어떤역활을하였는가?.... ....................................................................................... 진도-해남 명량대첩축제를 다녀와서| 답사 이야기 이명철 | 조회 171 |추천 0 | 2012.10.23. 15:30 // 진도-해남 명량대첩축제를 다녀와서 이 명 철 축제의 장으로 가는 가을 아침은 구절초 향 은은한 상쾌한 맑은 날이었다. 축제에 초청을 받은 우리 전라북도문화관광해설사 회원들은 그 의미를 극대화 하는 학술 심포지엄에 먼저 참석하였다. 심포지엄의 장소는 해남 우수영 유스호스텔회의장이었다. 회의장에는 ‘2012명량대축제 명량울돌목 역사교실이란 프랑카드가 걸려있다. 명량대첩의 재조명과 호남인물의 역할이란 주제 하에, 명량대첩축제의 슬로건은 ‘불멸의 해전사! 감동의 재현!’이었다. 명량해전에서.사호공오익창은 어떻한역활을하였는가?.해남유스호스텔.강연장에서내용.명량해전에서.사호공오익창은 어떻한역활을하였는가?.해남유스호스텔.강연장에서내용. 이번 학술심포지엄은 명량대첩의 전황을 생생히 기록한 오익창의 문집 ‘사호집(沙湖集)’이 발굴되어 그 내용을 자세히 공개하는 강의였다. 사호집(沙湖集)은 명량해전 당시 12척의 배로 왜군과 싸우는 장수들에 대한 지원상황과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사호집을 기록한 오익창(吳益昌, 1557~1635) 선생이 우리 전북의 고창출신이다. 우리 전북문화관광해설사, 아니, 고창의 문화관광해설사들에겐 눈이 번쩍 뜨게 하는 내용이 아닌가. 선생의 휘는 익창이고, 자(字)는 유원(裕遠)이며, 호(號)는 사호(沙湖)이고, 세게는 함양(咸陽)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유학의 업을 성취하고 학문을 쌓아 대유(大儒)라는 명성을 들었다. 그러한 명성에 따라 백호(白湖) 임제(林悌)가 찾아와서 함께 선운산에 수십일 동안 유람 차 머무르며, “호남에 그대가 아니면 내가 독보적일 것이다(호남비군[湖南非君], 아당독보[我當獨步])”라고 하였다. 임제로부터 선생의 뛰어난 학문을 인정받은 것이다. 명량해전에서.사호공오익창은 어떻한역활을하였는가?.해남유스호스텔.강연장에서내용.명량해전에서.사호공오익창은 어떻한역활을하였는가?.해남유스호스텔.강연장에서내용. 선생은 공조정랑에 재직 시 당시의 혼란한 상황에서 화를 피하지 못할 것임을 예견하고 관직을 버리고 남쪽으로 내려와 송사<松沙(茂長客舍가 松沙之館이다)>의 북쪽 심원동(深源洞) 별서(別墅)에 거처를 정하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중 수많은 전투가 있었으나, 그걸 다 섭렵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고로 오늘의 주제인 명량해전에 대하여만 강의 내용에 맞춰 정리해보기로 하자. 명량해전(鳴梁海戰)은 명(明)ㆍ일(日)간의 휴전협상이 결렬됨에 따라(1596.9월)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재침을 결정하고 북상을 계획함에 따라 결정된다. 이듬해 1월 일본은 남해에 주둔하고 있는 잔병을 포함하여 수ㆍ육군 14만여 명을 동원하여 다시 침략해온다. 이 무렵 조선의 조정은 어떠했는가! 임진왜란 전부터 율곡선생은 상소문에서 “나라가 나라가 아닙니다.”라고 말했고, 그로부터 10년 후, 임진왜란을 온몸으로 겪고 막은 류성룡도 율곡과 같은 말을 한다. “나라가 나라가 아닙니다.” 임진왜란을 겪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서로 물고 뜯는 조선의 조신들은 그저 제 안위 챙기기에만 급급한 이때, 일본은 재침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명나라에서는 자국의 해상방어를 위해 총독군문(總督軍門) 형개(邢玠)와 경리(經理) 양호(楊鎬)를 조선에 파견하고 지원병을 출동시켰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조신들은 싸움의 표적을 안에 두고, 누군가를 늘 탄핵해야 했고, 적을 물리치는 것과는 전혀 관계없는 그들끼리의 논쟁과 탄핵으로 매양 들끓고 있었다. 명량해전에서.사호공오익창은 어떻한역활을하였는가?.해남유스호스텔.강연장에서내용.명량해전에서.사호공오익창은 어떻한역활을하였는가?.해남유스호스텔.강연장에서내용. 임금도 마찬가지였다. 선조임금에게는 나라라는 개념이 없었던 건 아닐까. 그에게는 오로지 왕의 자리를 보전하는 것만이 있었던 것 같다. 명(明)에 기대어 명군(明軍)이 없으면, 궁궐에 불 지른 백성들이 그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 그게 바로 선조가 생각한 조선백성이 아니었겠는가. 그러기에 정유재란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 조선조정은 코니시의 반간계에 넘어가 이순신을 하옥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정유재란은 다음달 2월 21일에 일어났다. 왜에서 돌아온 명과 조선 사신들이 토요토미의 대군동원령을 눈치 채고, 새로운 전란을 예고했었다. 그런데 어떻게 코니시의 반간계가 통할 수 있었을까. 반간계의 내용은 이러했다. “며칠날 카토오 기요마사가 조선으로 오니까, 그때 수군을 동원하여 카토오를 사로잡아라. 이는 엄청난 군사비밀이니 그대로 시행하라.” 이런 내용의 반간계라면 삼척동자가 들어도 거짓임을 알 수 있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정보가 아니던가. 이순신 장군이 그것이 거짓 정보임을 모를 리 없었고, 거짓 정보에 농간을 당할 리도 없었다. 조신들은 왜의 재침은 생각 밖이고, 선조의 심기에 편승해서 이순신을 처치해야 한다고 나선 것이다. 그리하여 이순신은 하옥되기에 이른다. 류성룡은 있는 힘을 다해 선조를 설득했으나 선조는 그럴수록 더 격노했다. 대간들 중에는 선조의 뜻에 영합하여 이순신을 참형에 처해야 한다고까지 몰고 갈 지경이었다. 이때 오직 판중추부사 정탁(鄭琢) 만이. “순신은 명장입니다. 죽여서는 아니 됩니다. 군사기밀의 이롭고 해로움은 조정 먼 곳에서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순신이 나가지 않는 것은 반드시 무슨 뜻이 있어서일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너그럽게 용서하시어 뒷날의 공을 이루도록 하시옵소서.”라고 했다. 조정에서는 고문을 가한 후 사형을 감하고 관직을 삭탈한 채 군에 편입토록 하였다. 명량해전에서.사호공오익창은 어떻한역활을하였는가?.해남유스호스텔.강연장에서내용.명량해전에서.사호공오익창은 어떻한역활을하였는가?.해남유스호스텔.강연장에서내용. *이때의 사정을 류성룡은 징비록(懲毖錄)에 이렇게 적었다. ‘명의 참담한 패장 양호를 변호하는 데는 온 조정이 혈안이 되어 패장을 명장으로 떠받들고, 자기 나라의 명장은 명장임에도 패장보다 더 비참하게 사지로 몰아넣었다. 그것이 조선이다.’ 원균이 정유년 7월 칠천도에서 패해서 죽고 한산도 수영 본거지도 폐허가 되면서 조정에서 백의종군 하는 이순신을 수군통제사로 재기용하기에 이른다. 1597년 9월 15일 저 유명한 명량해전을 치르고 제해권을 다시 장악한 조선수군의 위력이 되살아 난 때,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죽는다. 이순신이 수군을 재강화하고 본영을 복구하고 있던 차, 류성룡의 탄핵과 체임(遞任) 소식을 들었다. “나랏일이 하나 같이 이 지경에 이르다니.” 실성한 듯 큰소리로 탄식했던 것이다. 나라가 얼마나 혼란하고 참담하면 장군의 입에서 이런 탄식이 절로 나왔겠는가! 그런 조정, 그런 군주에게서 기적은 이순신이 살아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위대한 종장을 불멸의 장으로 바다에서 끝마칠 수 있는 행운도 맞았다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끝마치지 않았다면 그의 끝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래서 장군이 일부러 그의 생을 그렇게 마감한 것인지, 그렇게 마감된 것인지, 죽은 장군은 말이 없어 아무도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는 임금을 원망하거나 조정을 탓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진정한 인간은 하늘도 원망하지 않고 남도 탓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더 위대하다. 이순신이 노량 앞바다에서 최후를 맞던 날(1598년 11월 18일), 류성룡도 한 달 이상 체임되어 있다가 영의정에서 파직된다. 일치라면 기묘한 일치이고, 운명이라면 기이한 운명이었다. 너무나 오래 이순신 장군과 류성룡의 ‘징비록’에 내 생각이 머무른 것 같다. 다시 명량해전에 대하여 이야기 해야겠다. 원균과의 갈등, 이산해, 김응남 등에 의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고, 1597년 3월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정탁의 상소로 4월 1일 풀려나 합천 초계에 있는 권율의 막하로 들어가 백의종군(白衣從軍)하여 공을 세우라는 명을 받는다. 그 후 열흘 만에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장례도 못 치르고 남쪽으로 길을 떠나며 어머님 영전에 울부짖어 곡하며 하직을 고한다. 그리하여 이순신 장군은 4월 3일 한성을 출발하여 4월 11일 모친사망, 4월13일 부고를 받고 모친 영전, 사당에 하직하고, 6월 8일 도원수 권율 진영에 도착한다. 총 66일이 걸렸던 것이다. 부언하자면, 원균은 칠천량 해전에서 1597년 7월 16일 크게 패배하고 180여 척에서 10여척만 남고 한산도가 함락되었다. 그러함에도 임금과 조신들은 입으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다행이도 김명원과 이항복이 이순신의 재기용을 강력 추천, 7월 23일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하였다. 장군은 진주에서 보성에 이르는 동안(8월 9일) 병선 10여척을 수습하고 100여 명의 병력도 모았다. 명량해전에서.사호공오익창은 어떻한역활을하였는가?.해남유스호스텔.강연장에서내용.명량해전에서.사호공오익창은 어떻한역활을하였는가?.해남유스호스텔.강연장에서내용. 이때 오익창이 의병을 규합하여 잔선(殘船)에 탄 수군들에게 식량과 군수품을 지원하는 등 의병활동을 전개하여 이순신 장군을 도왔다. 장군도 의지했다고 한다. 장군은 병선을 수습하고 여러 장수들에게는 전선(戰船),<귀선(龜船?)>을 꾸며 만들어서 군세를 돕게 했다. 이때 전선은 13척이었다. 30일 진도 벽파진(碧波津)에 진영을 설치했는데, 조정에서는 지난 해상작전의 실패로 수군이 불리한 상황임을 감안하여 육전(陸戰)을 명하였다. 이순신은 “지금 신에게는 12척의 전선이 있으니 죽을힘을 다해 막아 싸운다면 해낼 수 있습니다.”하며 충청 전라도는 물론 한양까지 지키는 것은 오직 수군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라고 강하게 주장하였다. 또한 부하들에게는 결사적인 자세로 전쟁에 임할 것을 당부한다. 9월 15일 조수를 타고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겼다.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필사즉생(必死則生), 필생즉사(必生則死),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일부당경(一夫當逕), 족구천부(足懼千夫)라고 했는데 오늘의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며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이순신 장군은 피난선 수백여척을 동원하여 수군 뒤에 먼 바다에 배치시키고 그 기세로써 왜군을 제압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때로는 군법으로 경고하고, 때로는 사기를 진작시켜서 13척으로 적선 133척과 격전을 벌인 결과, 왜선 31척을 분멸하는 전공을 세운다. 명량해전에서.사호공오익창은 어떻한역활을하였는가?.해남유스호스텔.강연장에서내용.명량해전에서.사호공오익창은 어떻한역활을하였는가?.해남유스호스텔.강연장에서내용. 이때 전북 고창출신의 오익창은 포의지사(布衣之士)로서 이순신의 부하로 들어가 파도와 화살, 총탄을 무릅쓰고 전라도 지역의 사민들을 모집하여 의병장으로서 전쟁 지원활동을 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전라 연해지역의 백성들도 떠나지 않고 응원과 후원으로 수군 지원활동에 적극 참여했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오익창이며, 명량해전 중에 의병으로서 헌신적인 지원활동으로 기여한 것이 승리의 한 요인이었다. 수군부대를 오가며 동아(冬瓜[과], 동고(冬苽[고]라고도 한다. 동아 속 썩는 것은 밭 임자도 모른다>)로 수군의 갈증을 해소시키고 솜이불을 걷어다가 방탄막이로 이용하게 하였다. 공은 영호남(嶺湖南)의 사대부들 중에 난을 피하여 바다를 향하는 자들의 배 천여척이 흩어져서 여러 섬으로 가려고 하자 “적병이 많고 통제사의 병사는 적어 금방 패배하고 말 것이다. 통제사가 패하게 되면 우리의 울타리가 철거될 것이니, 비록 외딴 섬에서 저마다 보존하고자 한들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힘을 모아 합세하여 통제사를 위해 성원(聲援)한다면, 온전히 살 길이 있을 것이니, 가령 죽을지라도 나라를 위해서 충성을 다했다는 명분은 있게 될 것이오.”라고 호소하였다. 이에 천여척의 배들이 공의 말에 따라 모두 출항하여 통제사의 배 뒤에서 물 위의 성곽 모양을 연이어 이루니 진영의 형세가 매우 웅장하였다. 이 얼마나 가슴 에이며 충정어린 호소인가! 이를 따라 준 백성들 또한 중상과 모략만 일삼는 조신들보다 진정 거룩한 충정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렇듯 선생은 칠천량 패배 이후 수군의 재기불능 상태에서 창의적(倡[여광대 창]義的)인 활동으로 군중을 규합하고 자발적인 의병지원을 유도하여 북상하려는 왜군을 격퇴하기까지 배후에서 헌신적으로 기여한 것이다. 이민서(李敏敍)가 쓴 ‘명량대첩비’를 보면, “통제사 이공(李公)이 진도의 벽파정 아래에 주둔하고 명량의 입구에서 일본 적을 대파하였다. 적들이 크게 패하여 전라도를 엿보거나 경기도, 충청도를 침범하지 못하다가 이듬해 철수했으니, 세인들이 ‘중흥한 전공’을 말하는 데는 공(이순신)을 으뜸으로 여기고 명량의 전투를 가장 특이한 승리라고 했다.”고 하는 데는 선생의 공 또한 지대하다 아니할 수 없다. 요컨대 한산도가 왜군이 호남을 향해 가는 경로로서 한산대첩이 해상 제해권을 차지하게 한 해전이었다고 한다면, 명량대첩은 한산도가 함락된 이후 기세를 역전히여 왜군의 북상진입을 차단하고 수군재건에 성공한 해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위 내용들을 종합해보면, 명량대첩은 이순신이 7년간 치른 해전 중에서 가장 큰 업적을 이룬 해전으로 평가되었음을 알 수 있다. 민간의 의병활동에 대하여 지금까지 나는 모르고 있거나 안다 하더라도 부분적으로 밖에 알고 있지 못하던 것을 ‘노승석’교수님의 ‘사호집’을 통해본 명량대첩의 의의‘의 강의와 강의 자료집에서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노승석’교수님의 사호집 발굴의 이번 강의는 당시 전황 및 의병활동상황에 대한 새로움이었다. 명량해전에서.사호공오익창은 어떻한역활을하였는가?.해남유스호스텔.강연장에서내용.명량해전에서.사호공오익창은 어떻한역활을하였는가?.해남유스호스텔.강연장에서내용. 사호집을 통해본 오익창의 업적은 명량해전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으로, 자료집에, 첫째, 피난선 천여 척에 승선한 사대부들을 종용하여 응원하게 한 것. 둘째, 피난선에 통문을 돌려 식량과 의복 등을 모아 지원하게 한 것. 셋째, 동아(冬瓜)로 전투하는 수군들의 갈증을 해소 시킨 것. 넷째, 물에 적신 이불솜을 방탄막이로 사용한 것. 다섯째, 거북선 제조에 참여한 것. 등의 가장 중요한 다섯 가지로 나누어 정리해 놓았다. 내 말이 아닌 교수님의 말씀을 빌리면 “요컨대 명량대첩의 의의는 이순신을 응원하는 전라지역 민간과 사대부들이 오익창의 주도하에 위장전술과 지원활동 등을 전개하고, 이에 힘을 얻은 이순신이 긴급 상황 대처에 효율적 성과를 거둠으로써 수군 재건에 성공한 해전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2년 뒤인 1594년 기근이 몹시 심해지자, 공은 집안 살림을 내어 혹 죽을 쑤어 베풀기도 하고 혹 마른 곡식을 나눠주기도 하니 사방의 사람들이 진휼청으로 가지 않고 공에게 와서 목숨을 보전하였다. 마침 노략질 하는 무리가 공의 집을 지나갔는데, “어진 사람이 살고 있으니 침범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당시 우환을 면한 집은 공의 집뿐이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지 20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평양은 두 달 만에 함락된 것이다. 아마 천천히 걸어갔어도 그 시각이면 거기에 도착했을 것이다. 조선의 군대는 거의 싸움다운 싸움 한번 못해보고 괴멸되어 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이란 나라의 임금과 조신들은 “아니되옵니다.”를 연발하며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날선 말들만 무성하여 죽고 죽이기를 끊임없이 계속하였다. 율곡의 10만 양병설이 율곡의 어디에도 없는데, 율곡의 제자의 제자들이, 그러니까 두 세대 후에 비문에 올려 율곡은 성인(聖人)화 하고, 류성룡을 속된 정치인으로 떨어뜨리려는 당파적 시기(猜忌)와 투기(妬忌)에서 비롯된 것임을 생각할 때,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임금이 임금 같지 않은데, 거기에 빌붙어 혓바닥만 놀리는 조신, 부패할 대로 부패한 온 나라는, 임진왜란 때는 평양까지 두 달이나 걸렸지만, 조선이 망할 때는 일본군이 와서 그냥 접수만 해버렸던 것이다. 과연 지금의 세태는 어떠한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 강의를 듣고 한 가지 서운한 게 있다면, 당시, 아니, 조선이 망할 때까지 임금이나 조신들의 근시안은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명량해전에서.사호공오익창은 어떻한역활을하였는가?.해남유스호스텔.강연장에서내용.명량해전에서.사호공오익창은 어떻한역활을하였는가?.해남유스호스텔.강연장에서내용. 후세를 사는 우리는 우리의 후세를 위해서라도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 선생의 역사에 관한 다음과 같은 경계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나라 망하는 것이 슬픈 것이 아니라 역사 망하는 것이 슬프다.” 이러한 조선의 신하들, 그 후대를 살아온 우리, 우리가 남의 나라 사람들 눈에 어떻게 보였기에, 중국의 석학 임어당(林語堂) 박사는 우리 민족성을 승기자 염지(勝己者 厭之)하는 민족이라 했을까.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싫어하는 근성이 강하다는 말로 시기(猜忌)와 투기(妬忌)가 많다고 설파한 것이다. 이러한 말을 그냥 흘려보내서는 안 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이와 비슷한 뭔가가 있다면 우리는 이를 ‘징비(懲毖)’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명량대첩축제의 날을 즈음하여 역사 인식을 바로 하는 새로운 역사관을 확립해야 하며, 다시는 처참한 역사의 반복이 없도록 징비(懲毖)해야 할 것임을 생각해본다. *참고 문헌 1)명량울돌목 역사교실(2012 명량대첩축제 강의 자료집) 2)조선은 왜 망하였나<징비록에 답이 있었다> 송복 씀. 이 글은 일정기간 지난 후 지우거나 수정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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