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 메뉴 바로가기 사이트이용안내 바로가기


참여마당


건전한 사이버 문화의 정착을 위하여 실명제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개인정보(주민번호, 휴대폰번호 등)가 게재되지 않도록 주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욕설, 비방, 장난 반복게시물 등 게시판의 개설 취지에 부합하지 않을 경우 예고 없이 삭제 할 수 있으며, 타인의 명예훼손, 법령위반 등은 처벌받을 수 있습니다.
게시판 글보기 테이블
제   목 해남 문화 유산 답사의 유감 --명량 대첩비를 찾아서
작 성 자 김용기 등록일 2017-03-03 00:00:00.0 조   회 800
첨부파일

문화 유산 답사 1번지인 진도 해남  강진 을 2월 말 2박3일 여정으로  짐을 바리바리 넣은 행장을

꾸려 나섰다.

아직은 이른 봄인지 동백이나 매화들은 눈치만 보는지 활짝 나서진 않고 상춘객들도 뜸하다.


서해안 고속따라 진도로 들어가는 진도 대교 초입에 우수영관광지가 있어 들렀다.

若無 湖南 是無 國家라는 돌 표지판이 눈길을 끈다.

풀어 쓰면 "호남이 없으면 국가가 없었을거다" 라는 의미이다.

호남인으로서 긍지를 느끼며 관광지를 들러보았다.


기념관은 그런대로  잘 꾸며졌지만 전시물중 오류를 발견하고  나가면서 문화 해설사께 말씀드렸으니  

다음에 방문하면 고쳐져 있길 바란다.

다름 아니라 명량대첩 탁본의 한문을 옆에 한글로 표시 해놨는데 大提學을 대재학으로 표기 한 것이다.

숙종11년(1685년) 당시 홍문관 대제학이신  김만중이 "통제사 충무 이공 명량대첩비"라고 비의 이름 12자를 상부에 전자로

쓰신 걸로 되어 있는데 이 또한  다른 자료와 상이 하여 확인 이 필요 하다.


관광지 제일 높은 곳에  최근에 만들어진 명량대첩 기념비가 있으나  진짜 명량대첩비(보물 제 503호)는 보이질 않아

 Information desk 의 젊은  직원에게 물어보니  위의 둘을 혼동할 뿐 아니라  명량 대첩비 자체를 몰라 어리둥절하던차,

마침  옆자리 문화 해설사께서 대략 위치를 알려주신다.


명량이라는 영화와 불멸의 이순신이라는  드라마에 익숙한 우리 젊은이들에게 더 이상의 것을 바라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영화 명량의 촬영지에 대한 홍보와 관심은 지대하지만  정작 우리가 알아야되고 지켜야 할  문화 유산에 대해서는  관심 밖

뒷전인 듯하다.


먼저 네비를 찍고  도로 상 안내 표지판에도 커다랗게 표시된 길을 따라 도착 해 보니 충무사 란 사당이 있는데

여기있던 명량대첩비는 다른 곳으로 이전 한다는 2011년도에 쓴 안내 표지판을 보고 , 하릴 없이 사당가는 계단을 올라간다.


이 충무공을 존경한다는 박정희 대통령 명에 따라 6~70 년대 당시의 성역화 작업의 일환으로 1962 년 건립되고 2년 후

김은호 화백이 그린 영정을  봉안 하였다고  하나  문이 잠겨있으니 알 도리가 없다.


친일파인 김은호 화백이  충무사의 충무공의 영정을 그렸다니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그 뿐인가  진주 논개사당(의기사) 의  논개 영정 과 순천의 충무사,한산도 제승당의 충무공영정 및 안중근의사 기념관의 영정도  

그 양반이 그렸단다.


이 많은 곳 중에서 유독 진주 시민들이 나서  그 영정을 떼어내는 우여곡절속에 지금은 새로운 국가 표준영정으로

교체 되었다 하니 다른 곳도 역사 바르게 세우기 관점에서 벤치마킹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찾는이 없고 관리인 또한 없어 관리실엔 거미줄이 쳐 있는데도 잠깐 외출중이라는  표지가 덩그레 있어 실소를

금치 못한다.


이 충무사엔 이제는  명량 대첩비는 없지만 명색이  충무공 사당이고 일년에 두 차례 제례를 올린다는데

주변엔 술병과 맥주 캔과 담배 쓰레기들이 굴러다니는 볼썽 사나운 모습이다.


과연 평시엔  내 몰라라 하다가 무슨 행사때만 빛내고 광내는  전시 행정적인 제례를  충무공께서 달가이  받으실까.


또한 혼란 스러운 것은 명량대첩비가 옮겨 간 곳 옆 넓은 공터에 역시 새로운 사당 등을 크게 지어 놓은지가

꽤 된 듯 싶은데 이  사당안에는 영정도 없고 그냥 외관만 번듯하다.


어쨋든  이 명량 대첩비는 1942년 민족 말살정책으로 강제 철거되어 경복궁 근정전 근처에 버려졌으나

뜻있는 해남인 들에 의해 구 충무사로 옮겨졌다가 우여곡절속에 다시금 원래의 자리에 옮겨 졌으니

더 이상 후손들이 가치를 몰라보거나 이리 저리 옮겨다니는 신세가 안되길 바란다.


또한 1950년 6.25 사변과 1980년 5.18 광주 민주항쟁시 검은 눈물을 흘렸다는 얘기들이 있다던데 더이상 충무공께서

눈물을 흘리게 해서는 안되지 않은가 .


今臣戰船 尙有十二

지금 신에게는 아직 열두척의 배가 있사옵니다.


임진왜란시 한산도 해전에서 대패당한 왜장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한 말이 귀를 때린다.


내가 제일 두려워 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존경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 역시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 하고 싶은 이도 이순신이다.


일곱갑자 (420년) 가 지난 지금도 명량대첩후 왜군들의 주변마을 대학살 로 죽임당한 민초들의 울부짖음을 간직하며

울돌목은 회오리 치듯 물살을  휘몰아 감으며 소리없는 울음을 토해내고 있다.


해남 군 관계자께서는 아래 혼란 스러운 부분을 확인하여 잡아 주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1) 명량대첩비 상당의 전자를 쓴 김만중의 직책은 ?

   -명량대첩 해전사 기념 전시관 내  한글역  ; 홍문관  대재학  ( 대제학이 맞음)

   -충무사내 문화재 위원 한글역(80.9)         : 홍문관 제학

   -명량대첩비 안내판                               :  홍문관 대제학

   -명량대첩비 문화 유적 안내판                 : 홍문관 대제학

   본인이 직접 비문 원문 (한자)을 확인한 바 , 전자를 쓴이는 홍문관 제학 김만중이고 , 대제학은  비문을 지은  이 민서임.


2) 명량 대첩비가 쓰여진 연도는 ?

  -명량대첩 해전사 기념 전시관 내  한글역  ; 숙종 11년 (1685년)

   -충무사내 문화재 위원 한글역(80.9)         : 숙종 11년 (1685년)

   -명량대첩비 안내판                               : 1686년

   -명량대첩비 문화 유적 안내판                 : 1686년

  비문 원문 끝에  乙丑 과  戊辰 이라는  년도가  쓰였으나 본인 역량으론 알수가 없음 .


ps: 이 사이트에 일종의 건의나 의견이 없어 부득불 나의 여행기 편에 확인 및 건의 사항 올립니다.

    


만족도 조사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만족하십니까?
해남군 QR코드
담당자
  • 문예관광팀 강영삼 ☎ 061-530-5121-531
갱신일자
2018-02-01
공공누리 마크(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