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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수군재건로 이진-어란진 답사기(2014.11.02.-03): 어란 여인의 가슴 아픈 이야기
작 성 자 임용철 등록일 2014-11-21 00:00:00.0 조   회 3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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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
  정유년 6월14일 권율 도원수는 통제사 원균에게 부산진 공격을 독촉하기 위해 사천에 가겠다고 결심했다. 원균은 안골포와 가덕도의 왜군을 육군이 먼저 다 토벌하면 수군이 부산포로 진격할 수 있다고 항변했다.
“장군, 그게 무슨 말이오? 나더러 먼저 출진하라고? 이순신과 똑같은 주장을 하는데, 지금 이순신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오?”
원균은 일본군이 육지를 장악한 지역에서는 수군작전이 불가함을 설득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장 시간 격군이 노를 저어가면 어디든지 포구에 정박하여 휴식을 충분히 취해야 해상기동작전을 할 수 있음을 조리 있게 설명했으나 조정의 명을 받은 권율은 막무가내였다. 부산진을 공격하지 않으면 자기도 이순신의 처지가 될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 도원수를 뭐로 보고 그따위 소리를 하는 거요. 아니, 자기 스스로 조정에 보고하기를 수군이 부산 앞바다에서 왜적을 막아야 한다고 하지 않았소? 아무래도 안 되겠네. 여봐라, 저자에게 율령이 정한대로 장형을 가하라!”
  사천에서 곤장을 맞은 58세의 해군참모총장은 분노로 몸을 떨었다. ‘이순신의 작전개념에 반대하는 논리를 일부러 적어 올린 장계가 이제는 내게 화를 미치는 구나.’ 그는 한편으로는 허망하면서도 권율에 대한 미움과 노기가 탱천해서 전 수군을 호령하여 부산으로 진격했다. 원균의 조선 수군은 전선 180여척의 막강 세력이다. 정유년 7월9일 부산 절영도(영도) 앞바다에서 왜선1,000여척과 싸웠다. 조선 수군 20여척이 먼저 공격했다. 그러나 격군이 피곤하고 조류가 거세서 배를 제어할 수 없게 되자 서생포에 상륙하려다 모두 살육 당했다. 탐색전에 패배한 원균은 사천으로 후퇴했다. 작전상보를 보고받은 권율은 전함대의 건곡일척 결전을 명했다. 원균은 7일 간 전세를 정비한 다음 16일에 다시 총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악천후에 먼 거리를 항해한 조선 수군은 칠천량에서 일본군에게 기습당해 괴멸되었다. 100여척의 전선이 파괴되고 수군은 거의 다 죽고 생존자 약간은 산산이 흩어졌다. 전라좌수사겸 수군통제사 원균,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가 전사했다. 경상우수사 배설만 살았다.
  18일, 권율 도원수는 이 소식을 듣고 마음이 산란하여 아무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이순신이 도원수에게 건의했다.
“제가 해안 지방에 가서 상황을 자세히 알아보고 난 뒤에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장군의 마음이 내 맘과 같소. 배설이 사천으로 귀환했다니 가서 알아보시오.”
도원수는 송대립, 유황, 윤선각, 방응원, 현웅진, 임영립, 이원룡, 이의남, 홍우공이 함께 가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날로 삼가현에 이르러 삼가현감을 만나 상황을 파악했다. 한치겸이 일행에 합류했다.
  19일, 이순신이 동산산성에 올라 형세를 살피니 적에게 발각되지 않을 만큼 산세가 험하여 안전할 것이라 판단해서 밤을 지내기로 했다.
  20일, 단성 현감을 만나 상황을 파악했다. 낮에 진주 정개산성 아래에 이르러 진주목사를 만나 적의 주둔상황과 아군의 준비를 파악했다.
  21일, 곤양에 이르러 군수 이천추를 만났다. 군수는 백성들이 군을 떠나지 않도록 잘 타일러 본업에 힘쓰게 하며 이른 곡식을 거두어들이기도 했다. 들에는 보리밭을 가는 농부도 보였다. 오후에 노량에 이르니 거제현령 안위, 영등포만호 조계종 등 여남은 사람이 와서 통곡했다. 패잔병사와 파난민들이 분노와 절망으로 울부짖었다. 이순신은 그들을 진정시키고 칠천량의  패전경위를 자세히 물었다. 우후 이의득이 보고했다.
“우리는 사천에서 400리를 항해 해 거제도 북쪽의 칠천도에 이르렀습니다. 그 전에 대마도에서 왜선 1,000여척이 부산포로 건너왔습니다. 그중 500여척이 우리를 기습하니 피곤해 쉬고 있던 우리는 제대로 대적하지 못했습니다. 형세가 여의치 않자 대장선이 먼저 달아났습니다.”
이순신은 기가 막혔다. 경상우수영 소속 배에서 거제현령 안위와 밤새워 이야기 했다. 그 바람에 눈병이 났다.
  22일 아침, 배설이 나타났다. 그는 곤양포에 판옥선을 대피시키고 있었다.
“배 수사, 내가 지금 원수의 명을 받고 상황을 파악하는 임무를 수행 중이오. 당시 상황을 자세히 말해줄 수 있겠소?”
“사천에서 원균 통제사가 도원수의 명을 받았는데 거역할 수가 없지 않소. 도원수가 곤장을 치면서 부산진을 치지 않으면 참수하겠다고 엄하게 명한 거요. 우리는 사천을 출항해 사흘 동안 노 저어 갔소. 격군은 물론이요 모든 수군이 피로에 지쳤는데 마지막 날에는 날씨마저 사나워 더 이상 진군할 수 없었소. 육지와 섬은 왜군 소굴이므로 바다 가운데 닻을 내리고 밤을 견뎠는데 그런 상태에서 당한 것이오.”
“장군은 어떻게 살아나왔소?”
“장군도 잘 알지 않소? 부산포 진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래서 장군도 서울에 올라가 고초를 겪은 것 아니오? 나는 상황이 여의치 않음을 진즉에 알고 있었소. 그래서 판옥선 주위에 견시를 세우고 탐망선을 멀리 내보내 적의 내습을 빨리 알았던 거요. 그 해역은 우리 우수영 관할이라 환하게 알고 있소. 나는 적의 공격을 받지 않는 퇴로를 확보할 수 있었소. 통제사와 전라우수사 진영에 알릴 여유가 없었소. 그들은 포위당했고 우리는 겨우 빠져나왔소.”  이순신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닷새 동안 강행군하여 합천 초계에서 이곳 남해안까지 내려오느라 신심이 고갈되었다. 늦게 남해현감 박대남이 거처한다는 곳에 이르렀으나 현감은 없어 만나지 못해 보다 자세한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병세가 악화돼 회복하려면 오래 걸릴 듯 했다. 밤늦게 곤양에 도착해 몸 저 누웠다.
  23일 아침, 5일간 초계에서 노량까지 400리길(150km)을 다니며 수집한 자료를 정리해 도원수에게 보냈다. 몸이 불편했지만 곧 진주를 향해 출발했다. 진주 굴동의 전에 묵었던 이의만의 집에 이르러 잤다. 배흥립이 소문을 듣고 일행에 참가했다.
  24일,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가을비다. 이의만의 조카 이홍훈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잠시 이 집에서 머물면서 해안의 상황을 파악해 원수부에 보고하기로 했다. 다음날 남해 현령이 온다고 소식을 전해왔다. 이순신은 그날 이후 정개산성 아래서 진주목사를 만나 상황을 보고 받았다. 비를 맞으며 정개산성 건너편 손경례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곳에서 며칠 묵으면서 지금까지 따르던 장병을 점검하고 훈련을 하면서 수군 재건을 모색했다. 도원수가 병졸을 보내주었다. 그들은 거의 알몸으로 왔다. 말은 물론이요 활과 화살도 없는 무지렁이였다.
  8월3일, 이런 상황에서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의 명령장을 받은 것이다. 수군 없는 수군
통제사는 생존한 부하장수를 모아야 했으나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칠천량에서 우리 수군이 당한 날이 지난달 16일이니 보름 이상 지났다. 지금이면 일본군이 통제영 가까운 해안을 거의 다 점령했을 것이다. 내가 갈 곳은 어디인가?”
이순신은 백의종군하던 7월22일에 칠천량 해전에서 살아온 경상 우수사 배설을 만난 기억을 더듬었다.
“우수사의 판옥선 12척은 온전하다. 그러나 배설은 서해로 진격하는 일본 수군을 저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군 100여척이 대적한 칠천량에서도 도망 나온 놈 아닌가? 왜적이 50리 이내로 접근 했으니 배설은 사천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했을 것이야. 해안은 왜군 소굴이 되었을 것이니 다시 가 봐야 우리 수군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일본군의 대규모 기습을 받아 대부분 전사했지만 소수의 장병이 뭍으로 올라갔을 것이다. 그러니 일단 내륙으로 가서 패잔병을 수습해보자.”
통제사가 된 이순신은 이렇게 추론하고 구례를 향해 말을 달렸다. 섬진강 북변의 석주관에 이르러 수비군 이원춘관 유해를 만나 일본군의 동태를 묻고 적을 토벌할 계책을 나누었다. 구례현에 이르니 백성들이 거의 다 산으로 피난을 가서 쓸쓸했다. 손인필, 손응남이 햇감을 바쳤다.
  8월4일이 밝았다. 통제사 직무 수행 이틀째다. 이순신은 말을 달려 압록강원에 이르렀다. 섬진강은 유유히 흐르는데 인적은 없다. 고산현감 최진강이 이순신의 재임 소식을 알고 멀리서 찾아왔다. 일행은 오정에 곡성에 들어섰다. 관청과 여염집이 모두 비어 있어 처량하기 그지 없다. 지금까지 따르던 남해현령 박대남을 남원으로 보냈다. 큰 고을의 사정을 알아보게 한 것이다.
8월5일, 말을 달려 옥과에 이르니 피난민이 길에 가득했다. 이순신은 말을 내려 백성들을 타일렀다. 현에 들어갈 때 이기남 부자와 정사준, 사립 형제가 합류했다. 이기남(李奇男)은 전라좌수영 선소(船所)에서 만든 거북선(左水營龜船)을 타고 처음으로 출격한 돌격장(突擊將)이다.
좌수영 소속의 이기남은 칠천량 해전에서 판옥선이 파괴되었지만 용케 목숨을 보전했다. 그는 해안을 점령한 일본군을 피해 내륙으로 들어 온 것이다. 통제사는 돌격장을 얻어 내륙에 들어온 보람을 느꼈다.

2. 이진-땅끝 구간 답사기
  2014년7월28일 회진까지 답사한 순례자들은 본의 아니게 3개월간의 긴 휴식을 가졌다. 혹서기가 지났어도 금오랑 직을 자청한 미하가 졸업50주년행사를 준비한다고 수군재건로답사를 추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0월9일의 기념식 행사를 마치고 드디어 11월 2일 다음 구간의 답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일행은 센트럴시티 터미널에서 8시10분에 출발하는 완도행 우등을 탔다.
“기사 양반 우리 일행이 11명인데 남창에서 세워줄 수 있나요?”
“못 내립니다.”
기사는 딱 거절했다. 검암은 기사의 단호한 말에 머쓱해서 더 이상 청해볼 수 없었다. 남창은 이진에서 출발하고자하는 일행이 내리고 싶은 곳이다. 우등버스는 25명승이므로 10여명이 내린다면 세워줄 수도 있을 거라는 기대는 물 건너갔다. 기사가 왜 잘라 말했는지는 나중에 현지에 가서야 이해하게 되었다. 버스는 정안 휴게소에서 15분 정차했다.
“정안은 환승하는 곳이야. 그래서 많은 버스가 여기서 쉬지.”
검암이 버스의 환승개념을 설명해 주었다. 그도 처음에는 환승을 어떻게 하는지 몰랐었다. 그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이렇다: 이제 여행자 갑이 A에서 출발해  B까지 가려한다고 하자. 그런데 A에는 B까지 가는 버스 노선이 없다. 갑은 정안에서의 환승 가능성을 찾는다. 마침 다른 곳 C에서  B까지 가는 노선이 있다. 만일 같은 시각에 두 버스가 정안 휴게소에 정차한다면 환승이 가능하다. 고속버스 회사는 모든 노선의 정보를 알고 있기에 환승 가능성을 판단할 수 있기에 환승표를 발매한다. 이용객이 실제로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나 이론상 가능하다.
    버스는 완도 대교를 건너자마자 원동교차로를 빠져나가 일행을 내려 주었다(13시). 완도버스터미널 13km 전이다. 만일 터미널까지 갔다면 완도를 걸어 나오는데 하루해가 다 갔을 것이다. 여기서 내릴 수 있는 것만도 다행이다. 다리만 건너면 남창이므로 다리 건너는 재미도 있는 것 아닌가? 고속도로는 출구가 아닌 곳으로 나갈 수 없다. 남창은 면소재지이나 고속도로 출구가 없으므로 기사가 내려 줄 수 없다고 잘라 말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답사자들은 버스에서 내리자 가까운 해영식당(061-552-5439)에서 소머리곰탕과 백반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옛 다리는 완도대교를 완공하고 폐쇄해 걸을 수 없다.  일행은 14시에 완도대교로 올라갔다. 바람이 몹시 거세 모자가 날아가지 않도록 단속해야 했다. 대교의 좁은 인도를 건너 달도로 내려가 걸었다. 본토와 연결하는 남창교도 새로 건설했는데 여기는 옛 다리가 남아 있다. 남창으로 건너니 바닷가에 휴식하기 좋은 나무 데크가 있었다. 일행은 현수막을 펼치고 출발을 인증했다. 1km정도 걸으면 이진성이다. 성은 해안가의 구릉인데 나무가 무성했다. 안내문은 이러했다: 고려시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건설했고 1555년 을묘왜변 이후 성이 더욱 강화되었다. 임진왜란 시 수군 만호가 지휘했다. 성은 남과 북이 높고 중앙에 마을이 있다.
“오늘 이진성을 보았으므로 목표의 90%를 달성한 거나 다름없습니다. 충무공이 배로 간 길을 따르는데 우리는 배가 없으므로 걷습니다. 날이 저물면 버스를 타고 갈 것입니다.”
이것이 미하가 대중교통수단의 이용을 정당화한 해석이었다. 실제로 수군재건로를 답사하려면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다. 충무공이 군함을 타고 간 포구와 포구를 연락하는 여객선이 현대에는 없다. 현대인이 그 포구를 갈 수 있는 방법은 걷거나 아니면 버스, 택시, 승용차를 이용하는 것이다. 
  이진리에서 서홍리, 신홍리까지는 바닷가를 걸었다. 멀리 완도대교가 보이는 바닷가에 갈대가 흰머리를 날리며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답사자들은 시원하게 트인 공간에서 저마다 카메라와 스마트폰에 자연의 빛과 향을 담았다.
 서홍-신홍-묵동 표지가 있는 신홍 버스 정거장에서 잠시 휴식을 했다(16:30). 이 길은 구도로다. 77번 신작로는 오른쪽, 즉 서쪽을 달린다. 미하는 속도를 빨리해서 앞서 나아갔다. 날이 저물면 이곳에서 묵어야 한다. 신홍리에는 ‘바다의 향기’라는 펜션이 있지만 검암은 땅끝마을에 가야 숙박할 곳이 많다고 했다. 버스를 못 타면 이 동네 민박이라도 찾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시골에는 민박이 별로 없다. 선두와 후미 사이의 간격이 1km 가까이 늘어졌다. 
  이진에서 땅끝마을까지 30km이상이므로 당초 계획에도 중간에 대중교통을 이용하도록 되어 있다. 날이 저물기 시작하므로 미하는 이제부터 버스가 오면 무조건 타고 땅끝까지 간다고 후미에게 전화로 알렸다. 버스는 후미에서 먼저 탈 것이므로 먼저 탄 사람이 앞에 걷는 사람도 태우도록 전했다. 시골 버스이므로 그런 편의는 봐 줄 것 아니겠는가? 선두가 77번 국도를 만나 잠시 걷는데 마침 땅끝 마을 방향의 버스가 오기에 세웠다. 기사에게 다음 버스를 물으니 막차란다. 미하는 맨 앞장을 섣는데 일행을 두고 혼자서 갈 수 없기에 버스를 그냥 보냈다. 묵동을 지나 안평마을 표지석에 이르니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17:07). 미하는 더 이상 갈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영전리 버스 정저장 앞의 ‘땅끝만물슈퍼’에서 막걸리를 샀다. 슈퍼 주인에게 택시를 불러 달라고 부탁하니 택시회사의 전화번호를 주었다. “택시 좀 보내 주셔요. 여기는 영전리입니다. 11명인데 땅끝까지 몇분 걸립니까? 한 대로 될까요?”
“네, 15분쯤 걸립니다. 3대를 수배하겠습니다.”
  회원들은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막걸리로 갈증과 허기를 달랬다. 택시 한 대가 먼저 도착했다. 25,000원이라는 요금을 2만원으로 조정했다. 4명이 타므로 1인당 5천원이면 감당할만하다. 도착하여 ‘땅끝마을케이프’ 식당에서 저녁을 마음껏 주문했다(18:30). 제포가 고등어조림, 갈치조림, 제육볶음 등 메뉴를 골고루 선택했다. ‘하얀집’ 모텔에서 방 하나에 4만원으로 4개를 정했다. 너른 온돌방에 모여 뒤풀이를 했다. 각자 지참한 안주에 소주와 맥주를 곁들이며 남도의 밤을 느긋이 즐겼다.

3. 땅끝-어란진 구간 답사기: 어란 여인의 투신
이 여사는 멋진 일출을 사진에 담겠다고 6시에 기상하여 카메라를 메고 땅끝전망대를 향했다. 마침 일찍 기상한 청호가 함께 나섰다. 이상하리만치 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날이 상당히 어두웠다. 해 뜨려면 한참 있어야 할 것 같다. 잠시 후 이 사장도 배낭을 메고 혼자서 전망대 오르는 길을 찾아 나섰다. 케이블카 타는 곳으로 가면 될 듯해서 그 방향을 잡고 해안을 걸었다. 때마침 수평선 위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전망대까지 안 가고도  일출을 보았으니 다행이다. 그런데 아무리 가도 전망대 오르는 길이 없다. 마침 마주 오는 관광객이 있어 물었다.
“그 길로 쭉 가면 나옵니다.”
이 사장은 5분쯤 더 가다가 뒤돌아섰다. 관광객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금오랑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망대 오르는 길이 어딘가?”
“지금 어디 있는데? 모텔에서 케이블카 타는 곳 가기 전에 오르는 길이 있어. 너무 갔구나. 지금 나도 오르는 중이니 따라 오게.”
  다른 일행은 7시 다 되어서 행장을 꾸리고 모텔을 나섰다.  전망대 오르는 길은 자동차도 오를 수 있다. 정상 가까이에 땅끝을 노래한 시를 새긴 시비(詩碑)가 있었다. 전망대는 입장료를 받는 모양인데 이침 일찍에는 근무자가 없다.
“서편으로 내려가면 땅끝 탑이 있습니다.”
검암이 하산 길을 안내했다. 자동차는 다니지 못하고 나무계단이 곳곳에 있는 길이다. 일행이 오르던 길보다 훨씬 운치가 있다. ‘아름다운도보여행’이 전라남도와 협약하여 만든 ‘삼남길’표지판이 보였다. 이곳이 최남단이니 삼남길의 출발점인 분명하다. 일행는 탑에서 현수막을 펼치고 출발을 기념했다. 해안을 따라 모텔 방향으로 되돌아 나왔다.
“아까 내가 여기가지 왔었는데. 오르는 길이 정말 있구나. 거의 다 왔었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갔을 텐데...”
이 사장이 행인의 말을 믿지 않은 것을 후회하는 눈치였다.
  미하가 빠른 걸음으로 앞장을 섰다. 식당을 알아봐야 하기 때문이다. 식당 ‘땅끝하우스’에서 조반을 하고 어란진까지 가기 위해 택시를 불렀다. 어제는 북평면 택시를 탔고 오늘은 송지면 택시를 탄다. 어란진 포구에 내리니 메타는 16,000원을 가리키고 있었다. 검암이 포구에 인접해 있는 파출소에 들어갔다 나왔다.
“보통 시골에는 마을을 안내해주는 사람이 있어. 부탁을 했으니 누군가 나올 거야.”
포구에 정박한 배를 보기도 하고 어란진 터가 어디쯤일까 궁금해 하면서 기다렸다.
“이 동네, 길이 하나뿐이니 그냥 우리가 가야하는 방향으로 갑시다. 가다보면 만나지 않을까요?”
금오랑이 앞장 서 서둘렀다. 가야할 길이 멀기 때문이다. 어란진 초교에 이르니 교문 바로 안에 충무공 동상과 거북선조형물이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전국적으로 이런 조형물을 많이 설치했다. 백의종군로 순례할 때 여산에서도 유사한 동상이 학교교정이 있는 것을 보았었다.
앞에서 다가오는 트럭의 운전자가 일행을 보고 차를 세웠다. 그는 청년회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어란진은 보통 이장이 안내를 하는데 출타중이란다. 그는 일행을 트럭에 오르게 했다. 부인들도 덜컹거리는 트럭 바닥에 앉았다. 언제 또 이런 경험을  해 볼 것인가? 오히려 즐기는 분위기였다.
“저기를 봅시오. 돌담처럼 보이지만 저것이 성터입니다. 지금은 돌담으로 사용 중인 저 집의 개인 소유랍니다.”
성터는 자그마했다. 아마도 나머지는 다 훼손되어 없어진 듯하다. 청년회장은 좁은 골목길로 트럭을 몰고 구불구불 진행했다.
“제가 꼭 보여 주고 싶은 곳이 있구만요.”
트럭은 해안가를 달려 바위가 멋진 막다른 곳에 이르렀다. 일행은 트럭에서 내려 청년회장을 따라 산으로 올라갔다. 멀리 진도가 보이는 곳이다.
“어란의 여인상이 있는데요. 정유재란 때 일본군의 출병정보를 이순신 장군에게 알려 준 여인이랍니다. 일본 무사와 정을 통했는데 그 군인이 명량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 절벽에서 투신했다는 이야깁니다. 지나는 어부가 시신을 수습해 저 위에 묻고 마을 사람들이 사당을 지어 넋을 위로해 왔구요.”
  미하는 이 이야기를 듣고 다른 생각을 해 보았다. ‘임진년에 조선 여인들이 투신한 이야기가 많지. 임진년 5월10일, 서울에 11만7천의 왜군이 집결해 ‘대휴식’에 들어갔어. 왜적은 여자 전리품을 구해 사방으로 날뛰었지. 율곡 부인 노씨는 세상을 떠난 남편의 묘에서 시묘하고 있었어. 그녀는 파주의 율곡 무덤까지 쫒아온 왜적에게 참살 당했어. 뛰어난 여류화가 율곡의 누님 이매창(李梅窓)은 강원도 안협으로 피난했으나 왜적이 덮치려 하자 벼랑에서 투신 자결했고. 같은 동네에 피난한 한음 이덕형 부인 이 씨는 영의정 이산해의 둘째 딸인데 그녀도 절벽에서 투신했어. 어란 여인도 왜장에게 몸을 더럽혔기에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었을 거야. 마을 사람들의 손가락질도 있었을 것이고... 물론 불쌍히 여긴 사림도 있었겠지만... 정숙한 여인은 두 남자를 섬기지 않는다(貞女不更二夫)는 정조관념이 지배하는 사회였으니 살아갈 수 없었겠지.‘
  어란 여인의 이야기는 일본에서 기록으로 남겨진 것이 발견되었다. 일제강점기 해남의 일본인 순사 사와무라 하찌만다로(1898~1988) 유고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정유재란 때 일본 장수 칸 마사가게(菅正陰)가 해남군 송지면 어란진에 주둔했다. 그의 연인 ‘어란’이 출병의 기일을 알게 되었다. 여인은 이 사실을 우수영에 있던 이순신 장군에게 은밀히 전했다. 명량 해전에서 이순신은 대승을 거두었다. 여인은 마사가게가 해전에서 전사한 것을 애달파하다 달 밝은 밤 명량 바다를 바라보며 투신했다. 어란진의 여낭 바위가 그곳이다. 여인이 투신한 낭떠러지라서 ‘여낭 터’이다. 어느 어부가 그 시신을 수습하여 바닷가에 묻어주었다. 들머리 해안에 석등롱을 세우고 그녀의 영혼을 달랬다.
 이 이야기가 사실일 것이라고 방증할 만한 조선의 자료가 있다. 다름 아닌 충무공의 난중일기다. 정유년 9월 14일(명량해전 2일전)에 나오는 ‘이름 모르는 김해인’은 바로 “김 씨 성만 있고 이름이 없는 여자‘ 또는 ‘김해 댁’이라는 여자라고 해석할 수 있다.
十四日壬寅。晴。任俊英偵探陸地。馳來言賊船二百餘隻內。五十五隻。已入於蘭前洋。又言被擄逃還人仲乞傳言。今月初六日。避亂于達磨山。爲倭所擄縛載倭船。金海名不知人。乞于倭將處解縛。夜。金海人附耳潛言曰。朝鮮舟師十餘隻。追逐我船。或射殺焚船。不可不報復。招聚諸船。盡殺舟師。然後直上京江云云。此言雖不可盡信。亦不無是理。故送傳令船于右水營。告諭避亂人。卽令上去。(십사일임인。청。임준영정탐륙지。치래언적선이백여척내。오십오척。이입어란전양。우언피로도환인중걸전언。금월초륙일。피란우달마산。위왜소로박재왜선。김해명부지인。걸우왜장처해박。야。김해인부이잠언왈。조선주사십여척。추축아선。혹사살분선。불가불보복。초취제선。진살주사。연후직상경강운운。차언수불가진신。역불무시리。고송전령선우우수영。고유피란인。즉령상거。) 
9월14일[임인/10월24일]  맑다. 임준영이 육지를 정탐하고 달려와서 보고하는데, "적선 이백 여 척 가운데 쉰 다섯 척이 이미 어란 앞바다에 들어왔다"고 하였다. 또 "적에게 사로잡혔던 김중걸이 전하는데, 김중걸이 이달 6일 달마산으로 피난갔다가 왜놈에게 붙잡혀 묶여서는 왜선에 실렸습니다. 김해에 사는 이름 모르는 한 사람이 왜장에게 빌어서 묶인 것을 풀어 주었습니다. 그날 밤 김해 사람이 김중걸의 귀에 대고 하는 말이, '조선 수군 10여척이 왜선을 추격하여 사살하고 불태웠으므로 할 수 없이 보복해야겠다. 그리하여 여러 배들을 모아 조선 수군들을 모두 몰살한 뒤에 한강으로 올라가겠다.'고 하였습니다."는 것이다. 이 말은 비록 모두 믿기는 어려우나 그럴 수도 없지 않으므로, 전령선을 우수영으로 보내어 피난민들을 타일러 곧 뭍으로 올라가라고 하였다. 
   난중일기의 기사를 정리해보자: 김중걸이 사로잡혀 왜선에 갇혔다. 어란진에서 이름 모르는 김해사람이 왜장에게 빌어서 김중걸을 풀어 주었다. 그리고 왜장의 전략과 의도를 김중걸에게 귀속말로 전했다. 김중걸이 그 정보를 충무공의 정보원 임준영에게 전했다.
  여기서 이름 모르는 ‘김해인’ 이라는 사람은 ‘김 씨“일까, ‘김해 댁’일까? 김중걸이 자기의 생명의 은인에 대해 이름을 모른다면, 실제로 김 씨라는 성만 있고 이름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조선 시대에 여자는 이름이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미하의 할머니도 호적에 한 씨라고만 되어 있다. 흔히 여자는 그 출신지방의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김해 댁, 보성 댁, 낙안 댁 등이 그것이다. 김 씨 성의 여인 또는 김해 댁이 왜장과 정을 통하고 있었다. 그녀는 왜장의 마음에 들었기에 간청하여 김중걸의 결박을 풀어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김중걸에게 군사기밀을 제공했다. 이로써 절개를 지키지는 못했으나 충성으로 이를 보상하려 한 것이 아닐까. ”마을 사람에게 나의 변명은 통하지 않아. ‘절개를 지키지 못한 화냥년, 왜장에 붙어먹은 년’ 소리를 듣고 살 수는 없어. 수치를 씻을 길은 투신 밖에 없다.“ 이렇게 결심한 것이리라.
남자들이 무능해서 당한 조선 처자의 가슴 아픈 이야기이다.

(참고)백의종군로 순례매뉴얼(400쪽), 수군재건로 답사기(구례, 곡성, 옥과, 낙안, 회진, 이진), 종군로에 대한 대동여지도를 보시려면 http://cafe.daum.net/roadofhearts 에 들어가 보시기 바랍니다. 회원가입 없이 모든 컨텐츠 볼 수 있음.


수군재건로 이진-어란진 답사기(2014.11.02.-03): 어란 여인의 가슴 아픈 이야기
수군재건로 이진-어란진 답사기(2014.11.02.-03): 어란 여인의 가슴 아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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