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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사 13대 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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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사 13대 종사

  • 위치 :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길 400
  • 문의
    문화관광과 문에담당: 관광안내:061-532-1330-061-530-5915 / 대흥사: 061-534-5502
    두륜산대흥사 홈페이지: http://www.daeheung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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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서산대사의 제자는 1000명에 이르는데, 그 가운데 유정. 언기. 태능. 일선 네 사람이 유명하여 서산 문하의 4대파라 일컫는다.

이 가운데 편양언기계와 소요태능계가 가장 번창하게 되는데, 대둔사에서 배출한 13명의 종사와 13명의 강사는 대부분 이들의 문도들이다.
소요태능계는 강진의 만덕사를 중심으로, 편양언기계는 대둔사를 중심으로 그 법맥을 계승하였다. 소요태능계인 취여삼우, 화악문신, 설봉회정 등은 대둔사의 13대종사이면서 만덕사의 8대사에도 포함되기도 한다. 더구나 대둔사의 제4대 대종사까지 편양언기계와 소요태능계가 서로 번갈아 가면서 대종사의 법맥을 계승하였다. 이들 서산대사의 두 법손들은 대둔사와 만덕사를 중심으로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조선 후기 서산문종의 법맥을 이끌었다.

❍1대종사 취여 삼우
취여 대종사(1622-1684년)는 속성이 정씨이며 강진현 보암방 구정리 사람,이다. 어렸을 때 만덕산 백련사에서 출가하였다. 법명은 삼우, 법호는 취여이다. 해운 경열 스님께 법을 듣고 크게 깨달았는데 해운 스님은 서산의 문화 소요 태능의 상수였으니 서산 대사의 증손이 되는 셈이다. 대흥사 상원루에서 화엄종지를 강의할 대는 인근의 주민들이 구름처럼 모여 청강하였다. 숙종 10년(1684) 6월 5일 입적하였는데 그의 나이 63세였다.

❍풍담의심
풍담 대종사(1592-1667)는 속성이 유씨이며 통진 사람이다. 16세 때 출가하였고 법명은 의심이며 법호는 풍담이다. 성순 노사를 은사로 득도하였고 원철 스님께 수계했으며 서산대사의 직계 수좌이던 편양 언기에게서 법을 배웠다.
대흥사에서는 스님을 해동 화엄종의 중흥조로 일컫고 있다. 현종 6년(1667) 금강산 정양사에서 입적하였다. 제자가 수백 인이었으나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상봉 정원, 월담 설제, 월저 도안, 기영 서운 등이 상수로 손꼽히는 수제자들이다.

❍월저도안
월저 대종사(1638-1715)는 속성이 유씨요, 평양 사람이다. 인조 15년(1638)에 아버지 유보인과 어머니 김시 사이에 태어났다. 어렸을때 출가하여 도안이라는 법명을 얻었으며 월저는 법호이다. 어렸을 때 천신 장로를 은사로 수계하였고 이후 풍담 종사 밑에서 수학하면서 서산대사의 밀전을 연구하였다.
27세때 묘향산에 들어가서 '화엄경'의 대의를 강의하였는데 사람들은 스님을 화엄종주라고 불렀다. 스님은 특히 불교뿐 아니라 백가의 모든 책에 통하지 못하는 바가 없었으며 법회 때마다 큰 원력으로 대승의 여러 경전들을 간행 배포하는 등 교화의 일선에서도 활약하였다.
숙종 41년(1715) 입적할때 상서로운 빛이 뻗쳐서 수백리 밖의 사람까지도 스님의 죽음을 알았다고 한다. 그의 나이 78세 임종했는데 제자가 수백명이었으나 특히 법명과 추붕 두 제자가 뛰어났다.

❍화악문신
화악문신(1629-1707) 스님의 법명은 문신, 법호는 화악이며, 성은 김씨로 전남 해남의 화산 사람이다. 대둔사에서 출가하여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으나 바탕이 영민하지 못해 글을 몰랐다. 농기구 행상으로 생계를 꾸렸는데, 하루는 상원루 밑을 지나다가 하도 피곤하여 메고 가던 짐을 내려놓고 쉬게 되었다. 때마침 상원루에서는 수많은 대중들이 운집한 가운데 취여 선사가 화엄의 종지를 강론하는 중이었다. 상원루 밑에서 고단한 몸을 쉬고 있던 화악은 마치 폭포수처럼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취여 선사의 강론에 차츰 심취되어 갔다. 넋을 잃은 듯 설법을 듣고 있던 화악은 마침내 그 자리에서 지금까지 줄곧 뇌리를 지배하던 의혹 덩어리가 일시에 부서지면서 새로운 정신세계가 열리는 것을 체험했다. 취여는 화악이 비록 초라한 몰골을 하고는 있지만 결코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 차렸다. 그윽한 시선으로 화악을 바라보던 취여는 오른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제자 될 것을 허락하였다. 운집해 있던 대중들은 예기치 않던 광경에 아연 놀라는 표정이었다.

글이라곤 도무지 모르던 화악이었지만 불법의 오묘한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서는 글공부 역시 게을리 할 수 없었다. 낮이면 절 안의 온갖 일을 마다하지 않고 밤이면 주워 온 솔방울로 불을 지핀채 밤 깊도록 경전들을 섭렵하느라 날이 밝는 줄도 모를 지경이었다. 뒤늦게 시작한 공부로 화악의 몸은 지칠대로 지쳤지만 그와는 반대로 정신은 더욱 또렷이 새로운 차원의 정신 세계를 열어나갔다. 어떤 고난에도 좌절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불굴의 정신만이 지칠대로 지친 화악의 정신을 지탱하는 유일한 힘이었다.
고난에 찬 3년의 세월이 흘렀다. 화악은 이제 무식한 농기구 행상인의 구각에서 완전히 벗어나 마침내 새로운 정신세계를 열어 가는 선사로서의 새 삶을 얻게 되었다. 함께 공부하던 도반들은 모두 일취월장으로 진전을 거듭하는 화악의 뒷전에 처지고 말았다. 스승의 가르침에 힘입어 불퇴전의 용맹정진 끝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것이다. 화악은 모처럼 대둔사를 떠나 제방 선지식들을 찾아 구름처럼 물결처럼 전국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선문답을 통해 미완성의 자신을 탁마 하였다.

공부가 진전될수록 도리어 자기 편견에 빠질 가능성도 높아진다는 점을 누구보다도 철저히 인식하였던 화악은 당대의 선지식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그들로부터 모두 인가를 받았다. 그리고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와 취여실에서 취여 선사로부터 청허-소요-해운으로 전해지는 법맥을 이어 받았다. 청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법을 이어받은 후 화악의 회상에는 불법을 배우려는 이들이 구름처럼 물려들었다. 화악은 이제 명실공히 국내 제일의 화엄강사로서 스승 취여의 강석을 물려받아 당당히 화염의 종지를 강론하였다.
[화엄경]은 석가모니께서 도를 이룬 뒤 27일 되던 날, 법계 평등의 진리를 깨달음으로 증명한 부처님의 만행. 만덕을 찬양한 경문이다. [화엄경]에 대한 연구는 일찍부터 이루어져 중국 동진의 각현에 의해 한역되고 또 [십지경]을 중심으로 하여 지방에서는 지론종의 연구가 있어왔는데, 이들은 모두 화엄사상의 발전을 보여주는 것으로 북제의 혜광을 비롯하여 이에 대한 많은 연구자가 속출하였다. 이렇게 하여 화엄종은 독립적으로 개종하여 천태종과 함께 불교학의 쌍벽을 이루게 되었다.
화악을 강사로 하여 대둔사에서 [화엄경]법회를 열 때면 듣기 위해 제방에서 모여드는 대중들은 수 백 명에 달하였다. 언젠가 대둔사에서 대규모 [화엄경] 법회가 열렸을 때 북방에서 명성을 떨치던 묘향산 보현사의 화엄강사 월저도안(1638~1715)이 남쪽 지방을 유력하다가 대둔사로 화악을 찾아왔다. 월저는 풍담의심에게, 청허-편양-풍담으로 이어지는 법맥을 이어받은 당대의 선지식이다. 조선 현종 5년(1664) 묘향산으로 들어가 강석을 열어 화엄의 대의를 강구하는 한편, 선대의 편양, 풍담이 계획하였다가 이루지 못한 [화엄경]의 한글화를 완수, 화엄의 종주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화악은 조선 인조 7년(1629)에 태어나 33년(1707)6월 26일 나이 79세로 입적하였다. 화악의 문인으로는 설봉, 벽하 등 21명이 특히 유명하다. 스님의 진영은 대흥사 상원의 영각에 모셔져 있다.

❍설암추봉
설암추봉(1651-1796) 스님의 법명은 추봉, 법호는 설암이며, 성은 김씨로 평안남도 강동 사람이다. 강동은 대동강의 중류평야에 임하여 있는 지역으로 농산물의 집산지이다. 스님은 가냘픈 모습에 풍채 역시 빼어난 데가 없었으나 두 눈동자만큼은 형형한 빛이 사람을 쏘았으며, 계행은 매우 엄정하였지만 사람을 대접할 때에는 신분의 귀천에 관계없이 평등하게 대우하였다. 담론할 때에 불꽃이 일 듯 정열적이었으며, 샘솟듯 그칠 줄 모르고 쏟아져 나오는 변설로 대중을 압도하였다.
원주 법흥사의 종안에게서 머리 깎고 스님이 된 뒤 벽계선사를 찾아가 손수 물을 긷고 절구질하면서 경론을 배웠다. 설암은 이 무렵 묘향산 보현사에서 화엄을 강론하며 제방에 이름을 떨치고 있던 월저도안대사를 찾아 길을 떠난다. 가득 고이면 넘어가는 정체하지 않는 물처럼 기어이 피안에 이르러는 설암의 구도 집념은 굳건하였다. 제자다운 제자를 기다리던 월저와 진리를 찾아 불원천리 스승을 찾은 설암은 서로 뜻이 맞지 않은 부분이 조금도 없이 의기투합하였다. 월저는 설암이 특이한 법기임을 알아차리고 제자로 받아들여 가르침을 내렸다. 설암은 월저를 모시고 10년 정진한 끝에 마침내 스승으로부터 청허-편양-풍담으로 이어지는 의발을 전해 받는다.

설암이 스승의 법을 이어 받은 뒤 남쪽 지방을 순회하며 가르침을 펴기 시작하자 남방의 학인, 납자들은 설암의 회상으로 구름처럼 몰려와 그의 가르침에 심취하였다. 조선조 숙종 32년(1706년) 8월 5일 입적하니 누려온 나이 56세였다. 스님은 효종 2년(1651년) 8월 27일에 태어났다. 다비하여 사리 5과가 나오매 나누어 낙안의 징광사와 해남의 대둔사에 각각 탑을 세워 봉안하였다. 사명 존자가 입적한 지 8년 되던 해(1618년)에 그 문인의 호소로 밀양 재약사(지금의 표충사)에 임금의 특명에 의해 사당이 세워지고 표충이라는 편액이 하사되었다.
그 뒤 1백 37년 되던 해 사명의 5대 법손 남붕이 재약사 표충사의 퇴락을 민망히 여겨 모아 사당을 중건하고 여러 학자들에게 시문을 받아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분충록] 1권과 함께 묶었다. 4집 가운데 [도서], [절요] 2집의 과문과 사기 2권이 세상에 유통된다. 과문이란 내용을 한번 보고 잘 알 수 있도록 간단한 설명을 붙이고 줄로 그어 내용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을 말한다. 설암이 지은 이 과문의 원래 이름은 [선원제전집도서과평]으로 2권이 모두 현존하며, 다른 하나는 [법집발행록절요사기(法集別行錄節要私記)]로 1권인데 잃어버렸다. 제자 법종 등이 경종 2년(1722년)에 편집한 [설암잡저]3권 3책과 [설암난고] 2권 1책이 전해온다. 대둔사 백설당에서 법회를 열었던 때의 기록인 [화엄강회록]이 대둔사에 전한다. 홍문곤 대제학 이덕수가 스님의 비석글을 지었다. 문인은 34명에 이른다.

❍환성지안
환성지안(1664-1729) 스님의 법명은 지안이다. 지안이란 법명으로 불리게 된 데는 내력이 있다. 스님이 춘천 청평사에 머물 때의 일이다. 청평사는 강원도 춘성군 북산면 청평리 670번지에 있는 절로 고려 광종 24년(973년) 백암선원이라는 이름으로 창건된 유서 깊은 곳이다. 경내 누대 밑에는 연못이 있었는데, 오랜 역사의 소용들이 속에 파묻혀 겨우 흔적만 보일 뿐이었다.
스님의 명에 의해 연못 속의 불순물들을 모두 치워내는 과정에서 짤막한 비석 하나가 발견됐는데, 그 비석에는 '유충관부천리래'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사람들은 신기해 하였지만 막상 이 글귀가 무엇을 뜻하는지 아무도 선뜻 나서서 해명하지 못하였다.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미소를 짓고 있던 한 객승이 성큼 앞으로 나서더니 시끄러운 좌중을 진정시킨 다음 논리 정연한 어투로 글귀를 풀이해 나갔다.

'유충(儒衷)이라 함은 '선비의 마음'이니 곧 '지(知)를 말하며, '관부는 '갓쓴 여자'이니 여자가 갓을 쓴 모양의 '안(安)' 지칭하는 것입니다. 또 '천(千)'자와 '리(里)'자를 합치면 중(重)자가 되는 법이니 '유충관부천리래(儒衷冠婦千里來)'는 곧 '지안중래'를 의미하며, 따라서 이 글귀는 '지안이라는 이름을 쓰는 선지식이 이곳에 다시 올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이로 인해 당시 제방에 이름 떨치던 환성 스님의 법명은 지안으로 굳혀졌다.
환성이라는 법호에도 내력이 있다. 스님이 해남 대둔사에 주석할 때의 일이다. 언젠가 부처님께 올릴 공양을 차려 놓자 공중에서 세번 스님을 부르고 스님 역시 세 번 응답한 일이 있어 드디어 법호를 환성, 자를 삼락이라 하였다. 스님의 성씨는 정씨로서 춘천 사람이며, 조선조 현종 5년(1664년)에 태어났다. 15세에 미지산 용문사로 출가하여 머리를 깎고 쌍봉정원에게서 구족계를 받은 뒤 17세 되던 해에 월담에게 가르침을 구했다. 월담은 한눈에 환성의 그릇 됨됨이가 범상치 않음을 알아차리고 마침내 의발을 환성에게 전해준다. 헌헌장부로 성장한 환성은 용모부터 윽이하여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골격이 말쑥하고 엄숙하였으며, 음석은 맑고 그윽하여 신비감을 자아냈다. 말은 조리가 분명하고 군더더기가 없이 간결하였으며, 얼굴빛 역시 늘 온화함을 잃지 않았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긴 경전들을 깊이 연구하느라 침식을 잊기 예사였다.

27세 되던 해에 환성은 모운진언 대사가 금산의 직지사에서 법회를 개설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 간다. 모운(1622~1703년)은 부휴의 고제인 벽암의 제자로 당시 삼남에 이름을 떨치던 화엄의 대종장이었다. 영조 1년(1725년) 전북 김제에 위치한 금산사에서 화엄대법회를 여니 1천5백여 명의 대중들이 참석, 대성황을 이루었다.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 역사적 집회는 당시 조정을 긴장케 함으로써 뒷날 환성을 귀양가서 죽도록 하는 비극의 불씨가 된다. 영조 5년(1729년) 마침내 법회사건을 끈질기게 호도해 온 한 무고자의 무고에 의해 환성은 지리산에서 체포돼 호남의 옥에 갇히게 된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환성은 끝내 불가함을 주장, 또 다시 머나먼 제주도 유배길에 오른다. 환성의 고난은 개인적 고난이 아니라 당시 혹독한 탄압을 받고 있던 불교 전체의 고난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제주도에서 유배된 지 7일째 되던 7월 7일, 환성은 중생구제를 위한 원대한 서원을 펴보지 못한 채 홀연 열반을 든다. 누려온 나이 66세, 법랍 51세였다. 환성의 열반은 곧 국가적 손실이라는 것을 시사하는 듯한 사건이 속출하였다 3일 동안 한라산이 울고 바닷물이 끓어오르는 등 이변을 보이자, 제주도 사람들은 환성을 삼성의 예언에 나오는 바로 그분이라고 단정하였다. 저술로 [선문오봉강요] 1권이 있으며, 문집 3권이 세상에 유통된다. 석왕사에 문집 [환성집]의 판본이 있다. 이조판서 홍계희가 비석글을 지었다. 환성의 비석과 부도는 모두 해남 대둔사에 보존되어 있다.

❍벽화대우
벽화대우(1676-1763) 스님의 법명은 대우, 법호는 벽하이며, 성씨는 박씨로 전라남도 영암 사람이다. 다른 위인들과 마찬가지로 벽하 스님 역시 출생과 관련된 꿈 이야기가 전해온다. 어머니 이씨는 어느 날 꿈에 푸른빛을 띤 새들이 어깨 위로 모여들고 푸른 노을이 품안으로 내리비치는 현상을 보고 나서 아이를 갖는다. 잉태될 때부터 이상한 조짐을 보였던 이 아이는 뒷날 새들의 구슬픈 울음소리를 듣고 출가할 것을 결심, 마침내 수행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스님은 조연 장로에게서 머리를 깎고, 화악대사에게 정교를 배웠으며, 환성대사에게서 선을 이어받고, 고압 선사에게 계율을 전해 받았다. 이들 네 분의 선지식들은 모두 휴정의 제5세 법손이다. 벽하 스님은 기상이 높고 가팔라 사람들이 쉽사리 오를 수 없었으며, 어떤 어려움에 부딪쳐도 되돌아서거나 굽힘없이 곧바로 앞으로 나아가 비록 사나운 호랑이와 마주쳤다 하더라도 마음에 조금의 동요도 없는 의연함이 있었다.

경교를 공부하면서 틈틈이 남는 시간을 활용하여, 제자백가와 고금역사서를 섭렵하여 두루 통달하였다. 만년에는 선송을 좋아하여 손에서 그러한 종류의 책을 놓지 않았다. 일찍이 구곡각운의 [염송설화]에 사이사이 잘못된 부분이 있음을 지적, 노쇠를 부릅쓰고 손수 글이나 말로써 오류를 바로잡아 나갔다. 벽하스님의 양미간에는 백호가 나있어 보는 사람들마다 기이하게 여겼다. 백호는 원래 부처님이 갖춘 32상의 하나를 지칭하는데, 눈썹 사이에 난 흰 터럭으로 광명을 무량세계에 비친다고 전한다. 스님의 풍모는 서릿발 같은 위엄이 어려 쳐다보는 이들을 두려워 떨게 하였으며, 참문하는 학인, 납자들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허망된 생각을 떨쳐버리도록 하였다.
스님은 조선조 숙종 2년(1676년)에 태어나 영조 39년(1763년) 6월에 생애를 마치니 누려온 나이 88세였다. 다비를 마치고 정골한 조각과 사리 1과를 수습하였다. 세자익위사의 부솔인 이의경이 비석글을 지었다. 문인 가운데 현암, 채미 등 4~5인의 특히 유명하다.

❍설봉회정
설봉회정(1678-1738) 스님의 법명은 회정, 자는 윤종이며, 법호는 설봉, 성씨는 조씨로서 영암 사람이다. 어머니 김씨는 평생 산목숨을 죽이지 않았으며, 이러한 불상생의 고귀한 마음은 초목에게까지도 미치어 막 자라나는 새싹을 다치지 않도록 늘 조심하였다. 하루는 꿈에 기이하게 생긴 사람에게 구슬 한 알을 받은 일이 있고 나서 얼마 뒤 임신하여 조선조 숙종 4년(1678) 1월 15일 옥동자를 분만한다.
날 때부터 맑고 우아한 골격을 지닌 이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서 아홉 살이 되자 자신의 숙연에 순응하여 달마사의 조명장로를 찾아가 수행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16세 되던 해 그곳에서 머리를 깎고 마침내 당시 제방에 도예를 떨치던 화악문신 대사를 찾아가 대사로부터 법통을 전해 받았다. 설봉 스님은 화악의 법통을 이어받고 나서도 또 다시 홀로 탐구하여 깨우친 바를 여러 경전에 수록된 내용과 일일이 비교 확인하여 걸림 없는 자유로운 경지에 도달하였으며, 글귀의 해석에 있어서도 세밀하고 정확하였다.
이에 남쪽 지역의 여러 비구들로서 선림의 종주라 일컬어지던 많은 스님들은 설봉 스님의 설법을 한번 듣고는 모두들 경복하였다. 설봉 스님은 본디 성품이 인자하여 주위 사람들과 고락을 함께 하였으며,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평소 때와 다름없이 태연한데다 말없이 자기 할 일만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님의 깊은 속을 들여다 볼 길이 없었다. 또 겉치장을 싫어하여 두건이나 옷이 낡고 떨어져도 꿰매지 않았으며, 머리칼과 수염이 간간이 깍지 않아 덥수룩할 때가 많았다.
설봉 스님은 가끔 외딴 섬으로 토굴을 묻고 '야은'이라는 편액을 내걸고 철저히 정진하였다. 스님은 병 치료를 위하여 요양하는 것이라고 했지만 실은 이름을 감추고 자취를 감추려는 의도였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무오년인 영조 14년(1738년)은 스님께서 회갑을 맞는 해인데 이해 9월 8일 입적하였다. 다비한 뒤 제자들은 사리 1과와 영골 1조각을 수습, 미황사에 탑을 건립하여 안치하고 비석을 세웠다. 비석글은 홍문과부제학 김진상이 지었다. 문인으로는 송파각훤. 진봉심우 등 16명이 특히 유명하다.

❍상월새봉
상월새봉(1687-1767) 스님의 법명은 새봉, 법호는 상월이며, 자는 혼원, 성씨는 손씨로서 순천사람이다. 조선조 숙종 13년(1687년)에 태어나 11세 되던 해에 조계산 선암사로 들어가 극준의 문신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18세 때 월저도안의 고제인 설암에게 참학, 도가 이미 통하매 의발을 전해 받고 이어 벽허. 남악. 환성, 연화. 등 여러 산의 노장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그들로부터 모두 인가받았다.
27세 되던 해, 조계산으로 되돌아오매 사방의 학인 납자들이 상월 스님의 회상으로 몰려들어 늘 성황을 이루었다. 언젠가 무용수연을 만나니, 그는 한눈에 상월의 인물됨을 알아차리고 ‘지안 이후 제1인자'라고 평하기도 하였다. 상월은 둥근 얼굴에 큰 귀였으며, 목소리를 종소리인 듯 우렁차고 앉음새는 마치 진흙으로 빚은 조각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한밤중에는 반드시 북두에 절하였으며, 언제나 명료한 강론, 군더더기 없는 풀이, 마음으로의 실천, 지혜로의 입증으로 가르침의 문을 삼았다.

또 처음 배우는 사람이라 하여 깨달음의 길을 소흘히 하지 않도록 재주가 높다 하여 계율을 함부로 범하지 못하도록 엄격히 지도하였다. 더욱이 옛 사람들이 주석과 해설에 얽매이는 것을 특히 걱정하여 반드시 배우는 이로 가려내 가르침의 본래적 의미를 알도록 지도하였다. 영조 24년(1766년) 10월 담담하게 입적하였다. 누려온 나이 81세였다.
다비하여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으나 탁준 스님이 유골을 받들고 관서 땅 묘향산으로 가서 막 초제를 지내려고 할 때 구멍난 구슬 3개가 출현, 드디어 세 곳에 부도를 건립하여 오도산에 그중 하나를 모시고, 나머지 둘은 선암사에 대둔사에 각각 안치하였다. 규장각 제학인 번암 채제공이 비석글을 지어 새긴 비석을 두륜산에 세웠다. 문인 32명중 세상에 이름을 떨친 이들은 용담. 해월. 화월 세 사람이다. 상월스님은 영조 10년(1734년) 봄과 영조 30년(1754년)에 각각 선암사에서 대대적인 화엄강회를 열었었다. 선암사에 [해주록] 1권이 수장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영조 30년 화엄강회때의 참석대중의 숫자와 이름이 적혀 있다.[화엄경] 강회는 3월 16일 시작하여 4월 3일 마쳤다. 또 대둔사 청풍료에서도 대회를 개설한 바 있다.

❍호암체정
호암체정(1687-1748) 스님의 법명은 체정, 법호는 호암이요, 성씨는 김씨로 전북 고창군 홍양사람이다. 조선조 숙종 13년(1687년)에 태어나 영조 24년(1748년)에 입적하니 나이 예순 둘, 법랍 마흔 일곱이다. 상월 스님과는 동갑이다. 환성스님에게 법통을 이어 받고, 합천 해인사와 양산 통도사에서 주로 살았으며, 가르침을 받기 위해 따르는 스님들이 늘 수백 명에 달했다. 나이가 들어가매 대중을 물리고 홀로 마음을 다스리며 정진하였다.
영조 24년(1748년) 3월 강원도 장구산에서 53 부처님상을 조성하고 회향식을 갖기 위해 호암 스님을 증명법사로 초정하자, 스님은 떠나면서 제자 유일을 불러 부촉한다. 스님은 이 해에 회향식을 마치고 나서 금강산으로 들어가 표훈사 내원통암에 머물며 조용히 열반을 준비하였다. 마침내 어느 날 스님은 자신의 입적을 예고하는 게송 한 수를 읊고는 표연히 세상을 떠난다.

스님은 일생에 세 번 큰 재난을 만났으나 그때마다 이를 슬기롭게 극복해냈다. 겨우 걸음마를 배울 때의 이링다. 집에서 불이 나서 삽시간에 불 속에 휩싸이게 되었는데, 아이는 태연스레 그 불 속에서 아장아장 걸어나와 마을 사람들을 놀라게 한 적이 있다. 또 조금 자라서 큰 강물을 건너가다 빠져 죽게 되었는데, 그 때도 몸이 물 위로 솟구쳐 올라 살았다. 또 한번 깊은 산중의 숲 속에서 사나운 호랑이를 만났으나 인근 바위굴로 피하여 무사할 수 있었다.
두륜산의 정진당에서 크게 [화엄경]강회를 열기도 했었다. 스님의 부도와 비석이 남아 있다. 비석글은 당시 이조판서를 지낸 바 있는 홍계희(1703-1771년)가 지었다. 스님의 진영이 있는데, 제자 유일이 찬미의 글을 지었다. 문인은 31명인데 이 가운데 이름이 강산을 진동케 한 스님만도 10여명에 이른다.

❍함월해원
함월해원(1691-1770) 스님의 법명은 해원, 자는 천경, 법호는 함월이고, 성씨는 이씨이며, 본관은 완산으로 함경남도 함흥 사람이다. 어머니 조씨는 어느날, 꿈에 큰 물고기를 보고 잉태하여 열 달이 훨씬 지나서야 아이를 낳았다. 열 네 살 되던 해, 도창사로 출가하여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된 이래 두루 전국의 선지식들을 찾아다니며 자신을 탁마 하였다.
뒷날 환성 스님을 섬기게 되었는데, 입실한 지 10여 년 만에 종문의 묘전을 모두 배워 마쳤다. 스님은 닭이 채 울기도 전에 일어나 가르침에 따라 정진하였으며, 해마다 겨울철이 되면 마치 기러기처럼 남쪽 지방을 찾아가 교화를 펴곤 하였다. 이는 스님의 신심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함월 스님은 또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만나면 즉시 자신의 옷과 음식을 아낌없이 베풀어 입히곤 하였다. 이는 자비심의 발로이다. 질병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자 스님은 대중을 불러모으고 임종게를 쓰고 나서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며 담담한 표정으로 열반에 들었다. 이는 스님이 사리에 통달한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예이다.

스님은 조선조 숙종 17년(1691년)에 태어나 영조 46년(1770) 80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칠 때까지 쇠잔한 진리의 등불을 지키며 교화를 폈던 인물로 환성지안의 의발을 이어받아 전한 당대의 선지식이다. 환성당에게 입실한 이래 40여 년간 조금도 게으름 없이 정진하였으며 불법 강론에 신명을 바쳤다. 스님이 살아있을 때 이미 어금니가 빠지면서 그 자리에서 사리가 나와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함월 스님의 저술로는 [천경집] 3권과 [법집별행록사기증정] 1권이 전한다.
함월 스님의 문집인 [천경집]에 수록된 몇 편의 시에서는 모든 세속적 물욕을 초월하여 청아한 삶을 살다 간 스님의 인춤을 엿볼 수 잇다. 열반에 든 뒤에 다비하자 특이한 뼈들이 출현하여 또 다시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제자들이; 안변 석왕사에서 탑을 건립하고 해남 대둔사 화엄대회 도량에 비석을 세웠다. 비서글은 영의정 김상복이 지었다. 문인은 스물 네 명인데, 완월 스님과 영파 스님이 특히 뛰어나 법향이 전국에 미쳤다. 안변 설봉산과 해남 두륜산에 스님의 진영이 모셔져 있는데 해마다 기일이 되면 제향을 올린다.

❍연담유일
연담유일(1720-1799) 스님의 법명은 유일, 자는 무이이며, 법호는 연담이다. 전남 화순읍 적천리의 개성 천씨 집안에서 만동씨를 아버지, 밀양 박씨를 어머니로 하여 조선조 숙종 46년 4월 30일에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하여 5세 때 이미 [천자문]을 배웠고, 7세 때 [사략]초권을 배우다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남을 따라 공부를 일시 중단하게 된다. 그 뒤 어머니의 엄격하고도 간곡한 가르침에 힘입어 인근의 대학자 문하에서 11세 때 [통감], 12세 때 [맹자]를 배웠으나 13세 되던 해 5월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 또 다시 공부를 중단하게 된다.
숙부의 보살핌 속에 다시 공부를 시작, 15세 때 [중용], [대학]을 배우는 등 학문에 매진하다가 18세 되던 해에 승달산 법천사 성철 스님의 권유로 마침내 출가하기에 이른다. 연담 스님은 19세 되던 해에 안빈 노스님에게 비구계를 받은 뒤, 그 해 6월부터 겨울까지 보흥사에서 은사 성철 스님으로부터 [선요]를 비롯하여 사집을 배워 마쳤다. 20세 때인 영조 15년 봄 대둔사 벽하 스님에게 [능엄경]을 배우고 여름 해제를 기하여 보림사 용암 스님에게로 가서 [기신론]과 [금강경]을 수학하는 한편, [기신론필삭기]와 [금강경간정]등의 틀린 부분을 바로 잡았다.
이듬해인 영조 16년 취서사 영곡 스님에게서 [원각경]을 배웠으며, 다음 해에 동갑인 응해와 함께 해인사 호암 스님을 찾아가 3년 동안에 걸쳐 공부 서래밀지를 터득하였다. 연담 스님의 학문 탐구는 그칠 줄 모르고 계속 이어진다. 영조 21년 겨울 내장산 원적암의 설파 스님 강하에서 [화엄경] 10지로부터 입법계품까지 수학하고 2년 뒤 영조 23년 봄 설파스님으로부터 마침내 입실을 허락 받는다. 그 뒤로 곡성 동리산에 가서 풍암 스님을 뵙고 법운암으로 가서 사월스님께 공부하였다. 영조 24년 강원도 장구산에서 53불을 조성하고 그 낙성식에 호암 스님을 청하여 증석에 앉게 하였다.

연담 스님은 사람됨이 질박 정직하고 탁 트인데다 소탈하였으므로 비록 세상에서 최고의 존경과 추앙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조금도 교만하거나 과시하는 법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뛰어나 널리 방대한 서적들을섭렵하였는데, 한 번 눈을 스치면 모두 기억할 정도였다. 연담 스님의 행장은 기록한 비가 두륜산에 있는데 수관 거사 이충익이 비문을 지었다. 스님에게서 선을 전수받은 제자가 42명, 교학을 전수받은 제자가 33명에 달한다. 스님의 진영은 두륜산 대흥사와 백양사에 각각 봉안되어 있는데, 당시 상국을 지낸 번암 채제공과 교리 벼슬을 지낸 이담원이 다같이 영창을 썼다. 연담 스님은 우리나라 불교 역사상 크게 주목받을 만한 인물중 한 분이다. 특히 스님의 독특한 사상은 조선조 후기 퇴락해 가는 불교계에 커다란 활력소를 제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초의의순
초의의순(1789-1866) 스님의 법명은 의순이고, 자는 중부이며, 법호는 초의 또는 일지암이라 불리웠으며, 성씨는 장씨이다. 어머니가 꿈에 큰별이 품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잉태하였다고 하며, 조선 정조 10년 4월 전남 무안군 삼향면에서 태어났다.
5세 무렵 강변에서 놀다가 급류에 떨어져 죽게 되었을 때 마침 인근 사찰의 어느 스님에 의해 구원되어 목숨을 건졌다. 그 스님이 출가할 것을 권함에 따라 16세 되던 해에 남평의 운흥사로 들어가 벽봉민성 스님을 은사로 하여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뒷날 대흥사 완호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고 초의라는 법호를 받는다.

초의 스님은 19세 때 월출산에 올라가 마침 해가 지면서 보름달이 바다 위로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일순 가슴이 탁 트이는 것을 경험하였다. 스님은 이때부터 두루 제방의 선지식들을 찾아다니며 더욱 탁마한 끝에 마침내 경율론 삼장에 통달하였다. 스님은 선교의 학문뿐 아니라 유학과 도교 등 제반 학문에까지 조예가 깊었으며 범서에도 능통하였다.
스님은 어느 한가지에도 능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동다송]을 지어 우리 나라의 차생활의 멋을 설명하였고, 범패와 원예,서예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장 담는 법, 화초 기르는 법, 담방약 등에도 능하였다고 한다. 스님은 고종 3년 81세를 일기로 대둔사 쾌년각에서 입적하니 법랍 65년이었다. 초의 스님은 조선중기의 진묵 대사를 이상적 인물로 생각하였던지 당시까지 전해오던 진묵 대사의 일화를 모아 [진묵조사유적고]를 편집하였다.
초의스님에게 사미계를 받은 스님이 40여명 보살계를 받은 스님이 70여명, 선교 및 잡공을 배운 사람은 수 백 명에 달하였다. 대둔사 남쪽 기슭에 부도를 세웠는데, 송파 이희풍이 탑명을 지었다. 탑의 오른쪽에 비석을 세웠는데 신관호가 비문을 지었다. 초의 스님은 서사로 유명할 뿐 아니라 다도의 중흥조로 추앙받고 있기도 하다. 그는 당대의 뛰어난 시인이며, 화가 음악가이자 쇠잔해가던 조선 후기 선종사에 활력을 불어 넣은 선문의 거목이다.
스님의 문학정신은 [일지암유고]에 선사상은 [사변만어]에 다도는 [동다송]에 각각 전해지고 있다. 초의 스님의 선사상에서 주목되는 것은 당시 불교계가 선 일변도로 흐르고 있는 사조에 반해 지관의 겸수를 통해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진리를 구현하려고 노력하였다는 점이다.

유적: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길 400(구림리 140-11)
참고문헌
동사열전, 대둔사(대흥사)문화와역사, 대둔사지, 해남의 시문학사, 한국문학을 빛낸 해남의 시인들,  해남역사문화자원 발굴조사(2012), 해남(한반도의 땅끝을 찾아서), 해남군 문화공보실, 해남군, 1996.해남(문화유적), 정윤섭, 향지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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