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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사 13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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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사 13대 강사

  • 위치 :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길 400
  • 문의
    문화관광과 문예관광담당 : 061-530-5915 / 관광안내:061-532-1330 // 대흥사:061-534-5502
    //두륜산대흥사 홈페이지: http://www.daeheung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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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대흥사 13대 강사로 꼽히는 스님들은 모두 제 10대 대종사였던 호암체정 스님의 문도들이다.
만화원오, 연해광열, 영곡영우, 퇴암태관, 완호윤우 등이 모두 호암체정의 문도들이다.
벽담행인은 부휴선수계로 제 8대 대강사에 오른 것이 특이하다. 아마도 부휴선수계도 대흥사(대둔사)와 일정한 관계를 지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만화원오
만화원오(1694-1758) 스님의 법명은 원오, 법호는 만화이며, 성씨는 이씨로 해남의 우수영 사람이다. 조선조 숙종 20년 9월에 태어나 영조 34년 8월 7일 열반에 들었으나, 나이 예순 다섯이었다. 스님은 어려서 수군영의 공생이 되어 관아를 출입하였으나, 성품이 본디 과묵하고 세속적 명리에 도무지 관심이 없더니, 드디어 대둔사로 들어가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만화스님은 당시 전국에 이름을 떨치던 당대의 선지식 환성지안을 모시고 경론을 배워 나이 30에 이르러 마침내 여러 경전의 뜻에 두루 확대시켜 나갔다. 인허 스님을 선사로 하여 선법을 받았으며, 학식과 덕행을 겸비한데다 화엄학에 정통하여 당시 사람들은 만화 스님을 화엄보살이라 일컬었다. 또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는 철저한 수행과 이웃을 자신의 몸 이상으로 아끼는 자비로운 보살행이 알려져 '살아있는 부처'라고 까지 존숭되었다.
스님의 주처에는 전국을 풍미하는 소문을 듣고 꼬리를 물고 찾아드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스님은 상원암에 머물면서 [화엄경] 39품의 종지를 밝혔다. 스님을 모시고 배우는 이들은 89~90명에 달하였다. 만년에는 '선을 통한 깨달음'으로써 구극의 수행방법을 삼았다. 대둔사에서 만화스님의 탑을 세웠는데, 세자익위사의 부책임자 이의경이 탑에 새긴 글을 짓고 동해상인 조병민이 글씨를 썼다. 스님의 영각은 만일동국선원에 있다. 문인은 80여명에 이른다. 스님은 순천 송광사에서 입적하였다.

❍연해광열
연해광열(1675-1722)스님은 성격이 호탕하고 이야기를 잘하였으며, 일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소탈하면서도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고 한다. 또 한번 선정에 들면 마치 바위처럼 묵묵부동하여 남이 그 마음속을 짐작하지 못했다고 한다.환성, 호암의 문을 드나들면서 불법의 묘리를 터득하매 배우려는 이들이 전국에서 몰려들었다. 연해 스님을 찾아와 배우는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실질적으로 얻는 바가 많았다.
스님은 강석에는 교강을 막론하고 일세의 종주가 되어 그의 강석에는 늘 수많은 학인들이 운집하여 크게 성황을 이루었다. 스님은 조선중기 이후에 정착된 사교입선의 교육 전통을 이어받아 선과 교에 모두 정통하였으며, 한편 간설여가를 이용하여 틈틈이 염불정진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조선시대 불교는 억불숭유의 정책적 특성 때문에 고려시대의 선과 교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또 한편 정토신앙이 크게 성행한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러나 선교의 종장들은 물론 대부분의 선사 강사 스님들이 서민들 사이에 성행하던 정토신앙에 깊이 관심을 갖지 않았었다.
연해 스님은 이와는 달리 서민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고 서민생활 속에 깊이 파고든 정토신앙을 받아 들인 특이한 일면은 지니고 있었다. 연해스님은 호암 선사로부터 법을 이어받고 자암전평에게서 법인을 전해 받았댜. 전평 스님은 자암이라는 법호에 어긋남이 없이 자비행을 펼쳤던 인물이다. 연해 스님에게는 문인 12명이 있다. 제자들은 스님의 부도탑을 건립, 두륜산 비전에 안치하였다.

❍영곡영우
영곡영우(1638-1715) 스님의 법명은 영우이고, 법호는 영곡으로 전북 고창군 선운사 사람이다. 대둔사 13대 강사중 세 번째로 꼽히는 분이다. 호암체정의 법을 이은 제자로 연담유일의 법형이다. 언제인가 대둔사 지장전에서 경정을 강론하는 모임을 크게 열었더니 모인 대중들이 수백 명에 달해 모두들 '부처님의 영산법회가 두륜산에서 재현되었다'고 찬탄하였다. 영곡 스님에 관해서는 생몰연대를 비롯하여 상세한 행장이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는데, 다행히 법제인 연담 스님의 자술연보의 기록 내용을 통해 생애의 편린이나마 유추해볼 수 있다.

'영조 15년 봄에 벽하 노스님께서 강설할 때에 수많은 학인들이 참여하였다. 그때 나는 그 곳에서 벽하 스님께 [능엄경]을 배웠고, 여름 안거를 마친 뒤 보림사로 가서 용암 스님께 [기신론]을 배웠으며, 경신에는 취서사의 영곡을 찾아가 [원각경]을 배웠으니, 그때 내 나이 21세였다.' 이것이 영곡 스님의 생애를 전해주는 자료의 전부로, 영곡 스님이 대둔사에서 크게 강회를 열었다는 사실과 그 강회의 성대함과 장엄함이 예전에 부처님의 영산법회를 방불케 하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조선조 중, 후기에 인악과 더불어 최고의 강백으로 일컬어진 연담 스님에게 [원각경]을 가르친 스승 혹은 법형이라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연담 스님의 연보에 거명된 벽하, 용암 등은 당대의 선지식들인데, 영곡스님이 그 반열에 끼어 있었다는 점에서 도의 높음과 인물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연담의 기록을 통해 영곡 스님의 생애가 약간이나마 소개되었고, 또 연담 스님께 [원각경]을 가르쳤다는 사실도 알 수 있게 되었으므로, 현재로서는 연담 스님의 생애와 관련하여 영곡 스님의 생애를 유추해 볼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연담 스님의 학력을 보면, 연담은 5세 때 [천자문]을 배웠고, 7세 때 이미 [사략] 초권을 배우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심에 일시 공부를 중단하였다가 9세 때 다시 입학하여 10세 때 [통감]을 배웠다.

11세 때 [통감]을 마치고 12세에 [대학]을 배웠으며, 15세에 다시 [중용]과 [대학]을 배운 뒤 18세 되던 해에 승달산 법천사의 성철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19세에 안빈 노스님께 [선요]와 사집등 불교관계 공부를 시작한다. 영조 15년 대둔사 벽하 스님에게 [능엄경]을 배우고나서 보림사 용암 스님께 [기신론]과 [금강경]을 수확하는 한편 [기신론필삭기]와 [금강경 간정]중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았으며, 21세 때인 이듬해에 비로서 영곡 스님 밑에서 [원각경]을 배우게 된다.

22세 때 해인사 호암 스님 밑에서 3년간 서래밀지를 터득하고 영조 21년 내장산 우너적암의 설파 스님 강하에서 10지로부터 입법계품까지 [화엄경]을 수확하여 영조 23년 봄 설파로부터 입실을 허락 받기에 이른다. 이러한 당대의 대강백인 연담 스님에게 [원각경]을 가르쳤다는 사실에서 영곡 스님의 학문의 깊이와 수행의 높은 경지를 짐작해볼 수 있다. 영곡 스님의 문인은 11명인데, 모두 북쪽 지역에 있으며, 현해모윤의 일파는 두륜산, 또 다른 일파는 월출산에서 이름을 떨쳤다. 문인 2명이 스님의 탑비를 수호하였다. 입적 연대는 분명치 않다.

❍나암승제
나암승제(1629-1707) 스님은 우연히 대둔사에 들렀다가 설담자우의 밑에서 입실제자가 되어 법맥을 이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나암 스님은 뒷날 대둔사에서 강회를 열게 되었고, 강회에는 제방의 학인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크게 학풍을 진작시키게 된다. 이른바 삼담으로 일컬어지는 춘담몽인, 화담영규, 운담대일은 모두 나암 스님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나암 스님에게 법맥을 전하여 준 설담 스님은 소요태능의 5세 법손으로서 일찍 어버이를 여의고 복천사에 가서 출가하여 서암 노스님을 은사로 득도하였다. 설담 스님은 이 무렵 호암체정이 방장산에서 개당하매 그곳에 가서 뵈었고 정조 20년 겨울, 남쪽으로 길을 떠나 설봉 스님을 찾아 뵈었으며, 또 모은 스님에게 공부하고 소요에서 제월 그리고화월 모은으로 이어지는 법맥을 이어 받는다. 이는 정조 22년 가을의 일이다.
설담은 만년에 북천사로 돌아와 연대소루에 주석하다가 순조 30년 향년 62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문집으로 [설담집]이 있는데, 당시의 여러 선지식들과 창화하여 읊은 시를 비롯 전국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며 선지식과 선사를 방문한 기록 등이 실려 있다. 나암은 만년에 자신에게 [화엄경]을 가르쳐준 설파 스님이 생각나서 그가 주석하고 있는 지리산 여원사로 또다시 찾아갔다. 함께 같은 길을 가면서 길잡이 역할을 하던 스승이 갑자기 훌쩍 다른
설담은 만년에 북천사로 돌아와 연대소루에 주석하다가 순조 30년 향년 62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문집으로 [설담집]이 있는데, 당시의 여러 선지식들과 창화하여 읊은 시를 비롯 전국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며 선지식과 선사를 방문한 기록 등이 실려 있다. 나암은 만년에 자신에게 [화엄경]을 가르쳐준 설파 스님이 생각나서 그가 주석하고 있는 지리산 여원사로 또다시 찾아갔다. 함께 같은 길을 가면서 길잡이 역할을 하던 스승이 갑자기 훌쩍 다른 곳으로 떠나버리자 삼담 스님들은 모두 설담의 문하로 들어가 입실제자가 되었다. 삼담은 모두 대강사로 당시 사람들은 '삼남의 학인들이 모두 삼담에게로 쏠렸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나암의 문인은 5명인데 춘계적암은 두륜산 스님이다.

❍영파성규
영파성규(1651-1706) 스님의 법명은 성규, 법호는 영파로서 함월의 법을 이어 받은 제자이고 환성의 손자 뻘 제자이다. 경남 합천군 해인사 인근 마을 출신이다. 영파 스님의 자는 회은이고, 성씨는 전씨로서 고려 옥산군 영령의 16대 손이며, 만기의 아들이다. 어머니 응천 박씨는 어느날 꿈에 큰 별 하나가 품안으로 날아드는 것을 보고 잉태, 조선조 영조 4년 기이한 골격을 갖춘 아이를 낳는다. 이 아이가 바로 조선조 후기의 쇠잔해 가는 불교에 새 희망과 활력소를 제공했던 영파 스님이다. 어려서부터 슬기로움이 뛰어나 9류의 학문에 통달하고 글씨를 잘 써서 이원교의 문하에 함예할 정도였으며, 글씨는 용이 꿈틀대듯 뱀이 내닫듯 힘차 보였다.

15세 무렵, 청량암에서 책을 읽다가 공양할 때 여러 스님들이 절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에 오묘한 느낌을 받아 출가할 뜻을 굳혔다. 4년이 지난 뒤 집을 하직하고 용천사로 찾아가 축라를 받아들여주기를 간청하여, 환응장로가 기특하게 여겨 이를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소년은 머리 깎고 계율을 받아 마침내 수행의 길로 자신의 인생 항로를 바꿨다. 영파 스님은 제방을 운유하면서 해봉, 연암, 용파, 영허 등 당대의 선지식들을 찾아다니며 그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부지런히 정진하였다.

영파스님은 정조 2년부터 정조 5년까지 대비주를 외우기 10만 번, 송주로 일과를 삼았다. 이보다 앞서 스님은 영조 30년 이후 당대의 대강백으로 이름을 떨치던 설파, 함월 두 화상에게 참예하여 [화엄경]의 종지와 선교의 요령을 모두 터득하고 함월 스님께 의발을 전해 받았다. 이때부터 스님은 조사선 여래선을 거침없이 설하였는데 조금도 막힘이 없었다. 대중들을 부르지 않아도 스님의 밑에는 늘 물이 아래로 흐르듯 많은 학인들이 몰려들었고, 명예를 팔지 않아도 스님의 문전을 늘 저자를 이루었다. 두륜산 대둔사의 약사전에서 크게 법회를 열자 수많은 스님과 신도들이 운집, 대성황을 이루었다.

영파스님은 대둔사 약사전에서 법회를 마치고 나서 신월암에서 하안거, 진불암에서 동안거를 보냈는데, 이 무렵 그는 대자유를 증득한 자신의 심정을 자주 시로써 드러내 보이곤 하였다. 형파 스님은 설파와 함월 두 스님으로부터 [화엄경]의 종지와 선교의 요령을 모두 터득한 후 함월 스님이 의발을 전해 받고 나서 영조 30년 이래 등단 설법하다가 순조 12년 생애을 마쳤다. 나이 85세, 승랍 66세였다. 스님의 성품은 온순하고 부드러워서 기뻐하거나 성낸 적이 없었으며, 돈을 품안에 넣고 다니는 일도 없었다. 문인 11명이 있었는데, 그중 설허가 수좌를 차지하였다. 스님이 입적한 뒤 4년만인 순조 16년 당시 규장각 제학으로 있던 남공철이 비석글을 써서 세운 비석이 은해사에 있다.

❍운담정일
운담정일(1678-1738)은 추월산의 스님이며, 소요태능의 후예이다. 걸담이 스승이며, 나암의 아우이다. 일찍이 정진당에서 강회를 열었다. 색성이 운담시문을 살펴보니, 시문 1권이 있으며, 자하산방이 교정을 보았다.

❍퇴암태관
퇴암태관(1687-1767) 대강사는 설파 상언 화상의 법사이며 호암 화상이 법손이 되는 셈이다. 청운당에서 강의를 열었다고 전한다. 특히 화엄사의 대가였으며 성품이 엄준하여 고요한 곳을 찾아 참선을 즐겼으나 번잡한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지리산에서 오래 은거하다 대중의 간청으로 대둔사에서 법회를 열었으나 만년에는 다시 지리산으로 돌아갔다. 부도와 탑은 담양(潭陽)의 용흥사(龍興寺)에 세웠다.

❍백담행인
벽담행인(1687-1748)은 서산대사의 법제인 부휴의 후예이다. 스승은 풍암, 조는 영해, 증조는 무용, 고조는 백암, 5대조는 취미, 6대조는 벽암, 7대조는 부휴이다. 일찍이 승당에서 강회를 열었다. 스님의 법명은 도문이고, 벽담은 법호이며, 성씨는 정씨로서 서울 영도사 스님이다. 벽담 스님은 조선조 말엽의 임금 고종과 인연이 있다.

조선 25대 임금으로 후사 없이 요절한 철종의 뒤를 이어 제 26대 임금이 된 고종은 기울어 가는 조선왕조의 비극을 대표하는 상징적 존재다. 고종은 철종 3년 7월에 태어나 12세 되던 해인 철종 14년 12월에 왕위에 오른다. 그런데 어릴 적의 고종은 한양 영도사 벽담스님 처소에서 주로 양육되고 있었다. 고종이 어릴 적에 영도사에 가서 노닐다가 절의 벽 한 모퉁이에 이름을 써 놓았는데, 뒷날 왕위에 오른 다음 절 이름을 바꿔서 개운사로 고쳤다. 이는 임금의 친필 글씨가 있는 데다 벽담스님을 존숭하는 뜻에서 취한 조치이다. 나라의 운명을 새롭게 열었다는 뜻이다.

❍금주복혜
금주복혜(1691-1770) 스님의 법명은 복혜, 법호는 금주이면, 성은 권씨로 전남 나주 사람이다. 성격이 호탕하고 임기응변에 능하였으므로, 사람들은 농담 삼아 '권장군'이라 부르기도 했다. 금주에 대한 기록은 자세하지 않은 편이나 그가 월파태율의 법을 이은 제자라는 점과 아암혜장으로부터 '종풍을 드날릴 인물'이라는 평을 받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영조시대를 전후하여 생존했던 인물로 보여진다.

월파태율은 숙종 21년에 태어나 15세 때 스님이 되어 호암체정, 상월새봉등을 찾아 경전의 이치를 배운 뒤 묘향산으로 들어가 이후 30여 년 동안 후학들을 가르치다가 영조 때 입적하였다. 저서로 [월파집]이 있다. 또 아암혜장은 영조 48년에 태어나 대둔사에서 스님이 되어 충계천묵에게 내외 경전을 배우고 다시 연담유일과 운담정일에게 내전을 배운 뒤 29세때 정암즉원의 법을 이었다. 30세 때부터 대둔사의 강석을 맡아 교화를 펴다가 40세 되던 해인 순조 11년에 입적하였다.

금주 스님은 이 두 스님의 사이에 생존했던 인물이므로 영조시대를 전후하여 대둔사를 주무대로 삼아 종풍을 드날렸던 것으로 파악된다. 절의 최고 책임자인 유나와 주지들도 금주 스님에게는 모두 머리 숙여 대우하였으며, 마을 안의 선비들도 스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스님을 벗으로 대하였고, 나이가 적은 사람은 제자의 예로써 대우하였다. 금주 스님은 절집 안에서 숭배의 대상이 되는 한편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까지도 존경받았을 뿐만 아니라, 억불의 시대 분위기 속에서도 불자로서의 높은긍지를 잃지 않았다.

간혹 관청의 책임자로부터 부름을 받았을지라도 말을 타고 들어갈 수 있도록 배려하지 않으면 결코 부름에 응하지 않았던 데에서 금주 스님의 의연한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스님의 호탕한 성격은 경전을 강론하는 데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말하자면 세세한 문법에 얽매이거나 집착하지 않고 글 전체의 중심적인 의미 파악에 관심 쏟도록 배우는 이들을 인도하였으므로 늘 많은 사람들이 스님을 좇아 공부하였다. 금주 스님은 화악문신의 증손자 뻘 제자이고, 벽허 스님의 손자뻘 제자이며, 월파태율의 법제자이다. 문하에 3~4명의 제자가 특히 유명하다. 금주 스님은 비록 문집이나 금석문 등 남은 기롯이 없어 그 인물됨을 자세히 고구할 길은 없지만 아무튼 조선조 중후기 사상계를 빛냈던 학장임에는 틀림없다.

❍완호윤우
완호윤우(1720-1799) 스님의 법명은 윤우, 자는 삼여이고, 법호는 완호이다. 아버지는 김시택으로서 해남 별진 사람이다. 열 세살 되던 해에 출가하여 두륜산 서일 노스님에게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된다. 열 일곱 살 나던 해에 구족계를 받은 뒤 백련법사에게서 교학을 익히고 연담조사로부터 선학을 배웠다. 완호스님은 뒷날 백련법사의 법을 이어 받는다. 백련법사로부터 의발을 전해 받은 완호 스님은 만행길에 올라 일정한 정처 없이 구름처럼 자유롭게 다니며 자신을 더욱 탁마하였다.

정조 19년 불호사의 일봉암에 주석하다가 이듬해 나주 쌍계사 보현암에 잠시 머물고 같은 해 겨울 그곳을 떠나 서운암으로 가서 살았다. 그리고 이듬해 여름 도갑사 하동암으로 옮겼다가 다음해 무오년 가을 본사인 대둔사에서 강경 대법회를 주재하여 요청을 받아들여 10월 대둔사 청풍요로 주석처를 옮겨 겨울을 났다. 스님은 그곳에서 1백여 명의 학인들에게 공부를 지도하며 학문연구에 심취했다. 정조 23년 정월 16일 상원으로 옮겨 주석했다. 이 무렵 은암대사가 새로이 입실하였으므로, 완호 스님은 은암 스님에게 간석을 물려주었다. 이해 9월 미황사의 청을 받아들여 중암으로 가서 머물다가 이듬해 또 본사인 대둔사의 청원에 따라 남암으로 가서 대보전의 단청을 고쳤다.

순조 원년 일봉암에 머물다가 이듬해 3월 함평 용천사로 가서 용문암에 주석하였다. 순조 3년 봄 환봉 스님과 미황사의 여척스님을 함께 서울로 보내어 돌을 매입하여 연담조사의 비석을 건립하였다. 이듬해인 갑자년 나주 쌍계사 은선암으로 옮겨 머물다가 여름에 문수암으로 가서 주석했다. 순조 5년 겨울 보림사 동암에 가서 지내다가 2년 뒤인 정묘년 봄, 청운당에거 가사불사를 베풀었다. 순조 8년 겨울 일봉암에 주석하고 있는데, 대둔사 낭암 화상으로부터 강경법회에 참석해 달라는 초대를 받고 내려와 대둔사에 머물다가 겨울이 난 후 다시 일봉암에 머물었다. 다음해인 순조 11년 2월 가리포의첨사가 늦은 밤절에 들어가는데 세 사람의 보좌관들이 횃불을 들고 창고에 들어왔다가 불씨가 떨어져 대둔사를 분패운 화재사건이 발생했다.

가허루 아래에서 일어난 이 화재로 인하여 가허루는 물론 천불전, 대장전, 용화당, 팔해당, 적조당, 지장전, 약사전, 향로전 등 아홉 동의 요사채가 하룻밤 사이에 잿덜미로 면하였따. 다만 보현저, 청풍료, 정진당 만이 이 화재에서 불에 타지 않고 무사히 보존되었다. 다음해에 완호스님은 손수 권선문을 짖고 제성 스님과 법당중건을 도모한, 은봉스님과 도감 새순 스님이 협력하여 이듬해 5월 극락적, 용화당, 지장전의 완성을 보였다. 순조 12년 봄, 호의 스님이 조실에 입실하여 향을 사르고 완호 스님의 법을 잇는 법제자가 된다. 완호 스님은 순조 17년 한양으로 가서 화사, 즉 그림 그리는 스님을 찾아 함께 경주 기림사로 내려가 크게 불사를 일으켰다.
이 무렵 30일 동안 기림사에서는 상서로움을 알리는 광명이 세 번 발하고 서기가 세 번뻗쳐 올랐댜. 경주에서 생산되는 옥석으로 1천불을 조성하고 있던 중에 나타난 상서였다. 스님은 평생 사유지의 소출이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았고, 죽을 때까지 옷이나 음식의 좋고 나쁨을 분별하는 법이 없었다. 선학을 전수한 제자 20여명, 교학으로 저수한 제자 10여명, 계를 받은 제자가 80여명에 이른다. 나라에서 '선교양종화엄강주'라고 하는 승직을 추종 하였는데, 스님은 그러한 이름의 승직에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선장이자 강백이라 할 수 있다. 두륜산 좌측에 부도탑을 세우고 대둔사 동쪽 골짜기에 탑의 오른편에 비석을 세웠다. 비문은 상국 권돈인이 지었다. 영각을 지어 스님의 영정으 모셨다. 완호 스님의 법호는 본디 완호(玩虎)가 아니라 완호(玩湖)였다. 훌륭한 제자들이 많았다. 덕행에는 성묵, 호의, 하의이고, 언변에는 환봉, 중화, 영서, 정사에는 설암 치암이고 문학에는 화담 초의이다.

❍낭암시연
남암시연(1789-1866) 스님의 법명은 시연, 법호는 낭암으로 영암사람이다. 스님은 조선조 후기 불교사에 찬연한 학문의 꽃을 피운 대둔사 13대 강백 중 한 분이다. 낭암 스님의 출생 및 출가 입적 연대 등은 전해오지 않고, 다만 그가 영암에서 태어나 달마산에서 출가하였다는 사실만 적혀 있다.[신중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미황사는 통교사, 도솔암, 관음굴, 서방굴, 수정굴 등이 달마산내에 있다고 되어 있다. 출가한 절이 미황사라고 명시되지는 않았으나 당대의 선장과 강백들이 대둔사와 미황사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또 낭암 스님의 스승인 설봉 스님 역시 미황사에서 출가 입적한 사실로 미루어 낭암 스님이 출가 입적한 절도 미황사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낭암 스님은 설봉 벽하스님 문하에서 불교 전적과 기타 불교 이외의 다른 전적들을 다같이 공부하였으며, 송암 스님의 조실에 들어가 향을 사루고 전법게를 받아 법을 이은 제자가 되었다. 스님을 백월과 형제 뻘이 되며 송파 스님의 제자이다. 언젠가 대둔사 약사전에서 [화엄경]법회를 열었더니 제방에서 학자 수 백 명이 모여 대성황리에 회향했다. 조선 순조 5년에는 화순 능주면 개천사 백련암에 주석하며 학인들을 지도하였다.

낭암 스님은 본디 성품이 질박 신실하여 조금도 꾸밈이 없고 계율을 철저히 지켜 몸가짐을 엄정히 하였으며, 가름침의 바다를 조용히 비추며 그 참뜻을 음미하였다. 스님이 출가한 것과 스님이 된 것, 세상을 떠난 일 등은 비석에 기록되어 있다. 낭암 스님의 비석은 달마산에 세워져 있는데, 감역 정학연이 비문을 지었다. 스님의 문인은 일곱 명이다.

❍아암혜장(연파대새)
아암혜장(1772-1881)은 설봉의 증손자이다. 송파각훤의 손자이며, 정암즉원의 자손이다. 일찍이 청풍료에서 강회를 여니, 그때의 나이가 겨우 30세였다. 자하산인, 즉 다산 정약용이 이르기릉, '아암의 본래 호는 연파이다. 대둔사의 12대 종사 맨 끝에 끼었지만 실제로는 끝이 아니고 꽃이니, 연로는 대련이고, 파공은 소련'이라고 했다.아암탑명에 이르기를 아암은 김씨이고, 혜장은 법명이며, 자는 무진이고, 본래의 호는 연파이며, 색금현의 화산방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대둔사에서 머리를 깎았다. 월송재관의 가르침을 받고 다음에는 춘계천묵을 찾아가 그의 외전의 엄관함을 배웠다.

아암은 깨달은 지혜가 남보다 뛰어나 글을 배운지 얼마 되지 않아 치림의 칭찬이 자자하였다. 불서를 널리 배우고 연담유일과 운담정일을 찾아가 배웠다. 나이 27세 때 정암즉원에게 염향하니, 곧 소요의 종파이고 화악문신의 적전이다. 아암은 여러 스님을 찾아 불경의 가르침을 받되 비록 저수청설이라도 문밖을 나서면 깨달음이 있어 입으로는 소리르 내니 비비라는 것은 신이라고 하였다. 다만 연담은 입으로 말한 것을 직접 기록하면서 비웃지 않았다.

나이 30세에 두륜의 강회에 맹주가 되니 모여든 사람이 100여명이나 되었다. 아암은 외전을 매우 좋아하여 주역과 논어 등의 지취를 깊이 연구하고 사색하되 유온이 없게 하였다. 기륜의 수, 율려의 도, 그리고 성리서 등을 연구하여 그뜻을 밝히니 유학자라도 그의 학문을 따를 수 없었다. 성품이 시 짓기를 좋아하지 않아 세상에 전하는 게 아주 적다. 또 가만히 있지 못하여 남의 글을 받으면 반드시 화답을 하니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병려문을 잘 지었으며, 율격이 정엄하였다. 불서는 능엄경과 기신론 그리고 조왕경, 측주등을 매우 좋아하였는데 불문에 귀의한지 오래되지 않은 자들이 미워하였다. 제자 두명이 있으니 수룡색성과 기어자흥인데 이들에게 의발을 물려주었다. 아암은 노련하였는데, 신미년 가을에 병을 얻어 9월 14일 북암에서 시적하니 그때 나이가 겨우 40세였다.

❍범해각안
범해각안(1820-1896) 스님은 신라의 학자인 최치운의 후예로 최수강의 6세손이다. 완도 범진 구계에서 부친 최철과 모친 성산 배씨 사이에서 1820년에 태어났다. 범해 스님의 제자 율암찬의가 1917년에 쓴 '범해선사행장'에는 그의 탄생과 관련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한다. 모친이 둑에서 흰물고기를 보는 꿈을 꾸고서 그를 낳았는데, 좌우의 바깥 넓적다리에 희고 긴 무늬가 많이 있었다. 그 때문에 어려서 그를 어언이라 불렀다고 한다. 꿈 탓인지 그는 일생 동안 생선을 입에 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는 성품이 유순하고 행동이 평온하며, 마음은 하늘을 거스르지 않고 순리에 충실했다고 한다. 14세에 대둔사에서 출가했고, 16세에 호의시오 화상에게 득도해 선사에게 삭발하고 승복을 입었다. 범해 스님은 대둔사에 종사하면서 많은 고승들로부터 수행을 쌓았는데, 하의정지를 설계사로, 묵화준훤을 수계사로, 화담영원을 증계사로, 초의의순을 비구 및 보살계사로 삼고, 호의시오를 전법자로 삼았다. 호의, 하의, 초의, 문암, 운거, 응화 6법사에게 수행한 그는 요옹 이병원 선생에게 유가경전을 전수 받으니, 경율론 삼장에 정통하고 유교 천도교 기타 각종 내외 학문에 능통하여 학자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화엄경을 강론한 것이 6회이고, 범망경을 강설한 것이 12회로, 22년간 강론하며 가르쳤다. 강론하던 틈틈이 [동사열전]을 집필하였는데, 이 땅에 불교가 전래된 소수림왕 2년 이후 조선 고종 31년까지 1천 5백년 세월 속에 이 땅에서 활동하였던 고승 1백 97명과 불교인 2명의 행장을 기록하였다. 모두 6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아도화상에서 회광 스님에 이르기까지 스님 197명의 행적을 기록한 불교사인 셈이다. [동사열전]은 한국의 불교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귀중한 사료이자, 불교문화로 대표되던 우리 나라의 정신문화사의 흐름을 조망해보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대둔사와 미황사 등 해남에서 활약했던 고승들의 행적이 대부분 기록되어 있어서 지역 불교사 연구에도 많은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다. [동사열전]은 각훈이 쓴 '해동고승전'과 함께 우리 나라 승전의 쌍벽으로 사라질 뻔한 역사의 자취를 담아놓은 소중한 그릇이라고 할 수 있다.

한시대의 학장으로서 거대한 작업을 한 범해 선사는 [동사열전]뿐만 아니라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은적사지]도 범해 스님이 집필한 것이다. 그는 또한 법을 설파해 수은한 자가 2, 사미계를 받은 자가 23, 교전자가 3, 선전자가 81인으로 그의 학덕으로 은혜 입은 자가 많은 것을 나타내고 있다. 범해 스님은 강론뿐만 아니라 방방곡곡을 두루 거치며 끊임없는 배움을 수행하곤 했는데, 강원도 금강산을 비롯 서울, 경기 등 명산, 명찰 등에서 견문을 넓혀 스스로를 낮추기도 했다. 범해 스님은 61세에 진도의 쌍계사에 들어가 대법당과 시왕정과 첨성각을 중수하기도 한다. 범해 스님은 고종 건양 원년에 77세로 입적하게 되며, 사리는 대둔사 부도밭에 봉안되었다.

*유적: 대흥사 및 성보박물관  :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길 400(구림리 799)
참고문헌
동사열전, 대흥사문화와역사, 대둔사지, 해남의 시문학사, ,해남역사문화자원 발굴조사(2012), 해남(한반도의 땅끝을 찾아서), 해남군 문화공보실, 해남군, 1996. 해남(문화유적), 정윤섭, 향지사, 1997. 땅끝해남,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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