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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문학의 선구자 - 옥봉백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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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문학의 선구자 - 옥봉백광훈

  • 위치 : 해남군 옥천면 송산길 37-9
  • 문의
    문화관광과 문화재담당: 061-530-5856 / 해남군 관광안내: 061-532-1330 / 061-530-5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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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 유랑문학의 선구자 - 옥봉 백광훈
조선 16세기 임안로, 허황 등이 중종의 문정왕후를 폐하려다 실패하여 폐사되거나 귀양을 가게 된 어지러운 시절, 문학인들은 이런 사회풍조에 맞춰 지팡이 하나에 짚신을 걸머지고 팔도의 명산대천을 유랑하며 어지러운 세상과 나라의 앞일을 문장으로 토해내는 유랑문학을 태동시켰으니.. 그 대표적인 시인 중 한사람이 옥봉 백광훈이다.

그의 맏형인 광홍(光弘)은 관서별곡의 저자로 유명하고 둘째 광안(光顔), 사촌 광성(光城)이 모두 특출해 당시 사람들은 이들을 일문사문장(一門四文章), 사촌 광성이라 불렀다. 또 최경창·임제·정철·이이 등과 교류하였으며, 고죽최경창· 생금이달과 함께 3당 시인으로 불려 조선 8문장가로 지칭되고 있다.

옥봉은 1537년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 출생으로 조상들의 높은 학문적 업적과 가풍을 이어받아 평생을 방랑시인으로 유랑하여 저항의식을 화선지에 토해냈다. 13세 나이로 문장가들에게 사사받았고 27세 때에야 아버지의 권유로 과거를 봐 진사가 되지만 입신양명의 꿈을 버리고 야인의 길을 걸었다.

비범함을 높이 인정받았던 옥봉은 여러 차례 추천을 받아 관직이 내려지자 41세 때 선릉참봉을 제수받아 나아갔고 44세 때 박순의 후원에 힘입어 예빈사참봉겸 감조감으로 일했다. 옥봉이 남긴 대표 문집인 옥봉집에는 모두 5백 4수의 시가 실렸는데 애틋한 향수와 자연을 초연하게 바라보는 관조미가 넘치고 있다.

봄산의 고사리만 보아도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것을 어찌 하리오 할 정도로 애수를 남긴 옥봉은 일찍 모친을 여의고(9세) 첫 아내를 젊어서(27세) 사별한데다 빈한한 가세 속에서 병약한 아내와 형제의 우애를 염려하던 인간적 배경이 그의 시에 짙게 깔려있다.
글공부를 위해 옥천면 대산마을로 들어와 후에 차남인 진남에게 지금의 터로 나가 살것을 명해 아버지의 유업을 송산리 로 모셔와 정착했다. 현재 옥봉의 유품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18호로 지정돼 해남군 옥천면 송산리 유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지난 81년에 지어진 사당도 여기있다.

옥천면 송산리 옥봉서실에는 옥봉 사당과 함께 그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 유물관이 있다.
유물관에는9종 113점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백광훈 교첩·유학백진남백패·옥봉집·가장필적·장춘동수창록·백옥봉목판·한석봉서증백진사목판·옥봉집목판·영여 등이 있는데, 「옥봉집」은 옥봉의 시문을 모아 아들인 송호의 주력으로 간행된 것이다. 그 외「가장필적」,「장춘동수창록」,「대둔산주창시운」,「대둔산송양기」,「옥봉만훈」,「송호만사」등이 수록되어 있다.

* 도교와 불교 아우른 옥봉의 시세계
지금까지 전해오는 옥봉의 문집으로는 《옥봉집》3권이 있다. 여기에는 모두 504편의 시가 실려 있는데, 특히 절구시(絶句詩)들이 돋보인다. 시의 내용은 주로 그리움과 이별의 정서, 인생무상, 속세의 영욕에 대한 초월 등의 정서를 읊고 있다. 그런 정서를 담은 대표 작품으로 ‘기우(奇友)’가 있다.

객행지근원(客行知近遠)  나그네 갈 길이 멀고 가까움을 아니
처처유청산(處處有靑山)  곳곳마다 청산이 첩첩이 가로막아
일만강남망(日晩江南望)  저물녘 햇살에 강남을 바라보며
상사연자환(相思燕子還)  제비 돌아올 날만을 생각하네.

옥봉의 시제는 인간과 자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중국 황제를 소재로 한 칠언시 <명황(明皇)>에서 당시 조선의 정치상황을 통렬하게 풍자함으로써 저항시인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양귀비와 더불어 호사를 누리다가 안녹산의 난으로 황제자리를 아들에게 던져주고 서촉으로 도망쳐 다니던 당 현종의 행각을 거울로 삼으라며, 조선의 위정자들에게 채찍을 가하고 있다.

서촉풍상양발사(西蜀風霜兩髮絲)  서촉에서 겪은 갖은 풍상에 귀밑머리 희어지고
귀래흥경경기위(歸來興慶更羈危)  편한 세상에 돌아오려 해도 더욱 나오기 어려우니
가련남내천이고(可憐南內遷移苦)  가련하다 남녘에서만 이리저리 떠도는 괴로운 신세
막도당시유록아(莫道當時有祿兒)  당시 안녹산의 난 때문이었다고 말하지 말라.

옥봉은 지행합일을 중시하였다. 그것은 양명학의 대가였던 스승 노수신의 영향인 듯하다. 또한 옥봉의 사상은 ‘만물일체’와 ‘삼계유심(三界唯心)’ 등 불교적 관점과도 닿아 있다고 한다. 실제로 그가 남긴 시 중에는 절이나 스님을 소재로 한 작품 여러 편 전해온다. 절을 소재로 한 대표작으로 <두륜사(頭輪寺)>를 들 수 있다.

간향잔원출석간(澗響潺湲出石間)  시냇물 소리 천천히 바위 사이로 흘러나오고
법당무객로승한(法堂無客老僧閑)  법당에 찾는 이 없어 늙은 스님 한가하네.
일모백운봉후과(日暮白雲峯後過)  해 저물녘 흰 구름 봉우리 뒤로 지나가자
만주홍엽하한산(萬株紅葉下寒山)  만 그루 나무 붉은 잎은 차가운 산에 떨어지네.

확실치는 않지만, ‘두륜사’는 해남 두륜산 자락에 있는 암자 가운데 하나였을 것으로 보인다. 또는 오늘날의 대흥사를 그렇게 불렀을 가능성도 있다. 절 이름이야 어찌되었든, 어느 가을날에 시적 화자는 단풍으로 붉게 물든 두륜산 밑자락에 서서 법당의 한가한 풍경과 산사 주변 계곡에 흐르는 차가운 물, 그리고 붉게 타는 노을 속에 떨어지는 낙엽을 청각과 시각을 동원하여 노래하고 있다.
한편, <과보림사(過寶林寺)>라는 시 또한 절과 스님을 소재로 한 작품인데, 시상 전개가 앞서 예로 든 <두륜사>와 흡사하다. 또 고려 때 융성했다가 폐허가 된 절의 모습을 읊은 <홍경사(弘慶寺)>라는 시도 있다.

추초전조사(秋草前朝寺)  가을 풀숲에 앞 왕조의 절  
잔비학사문(殘碑學士文)  부서진 비석에는 학사의 글
천년유유수(千年有流水)  천년 동안 흐르는 물이 있어도
낙일견귀운(落日見歸雲)  해질녘에 돌아가는 구름 보이네

부서진 비석을 제재로 시각적인 이미지를 극대화하면서 쓸쓸한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한 시다. 이미 폐허가 되었지만, ‘홍경사’는 고려 때 융성한 절이었다. 그런 절터를 통해 인간 세상의 유한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백광훈은 단지 역사적 허무주의에 머무르지 않는다. 지금도 흐르고 있는 물소리로 유구한 자연의 생명력을 보여주면서, 더불어 그것과 인간의 유한한 삶을 대비시키고 있다.
이밖에도 옥봉의 시에는 ‘태상스님’, ‘의연대사’, ‘성원스님’, ‘사준스님’ 등 승려들의 법명이 자주 나온다. 이처럼 옥봉의 시에서 불교 냄새가 많이 나는 것 또한 스승 노수신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노수신은 서산대사 휴정(休靜) 등 큰스님들과 교류하며 불교사상에 상당히 깊은 식견을 가진 문인이었다. 게다가 옥봉 자신도 생전에 절을 자주 드나들며 스님들과 선문답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옥봉의 아들 백진남이 <옥봉집> 목판을 대흥사에 의뢰하여 만들게 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을 터다.
옥봉의 시는 애틋하고 다정하다. 그의 시에는, 아홉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첫 아내와 사별하였으며, 가난한 처지에 병약한 식구들을 거느리고 살던 인간적 고뇌가 묻어있다. 하지만 그러한 고뇌가 슬프되 어둡지 않게, 따뜻한 인간미로 승화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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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광훈목판본(유형181호).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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