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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윤두서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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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윤두서고택

  • 위치 : 전라남도 해남군 현산면 백포길 122
  • 문의
    문화관광과 문화재담당 : 061-530-5227 / 해남군 관광안내: 061-532-1330 /061-530-5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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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조선 후기의 선비화가인 공재 윤두서(1668∼1715)가 살던 집이라고 한다.
윤두서는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함께 조선 후기의 3재로 일컬어지며, 고산 윤선도(1587∼1671)의 증손자이다. 윤선도가 풍수지리상 명당터에 이 집을 지었으나, 바닷바람이 심해 다른 곳으로 옮기고 증손인 윤두서가 살게 되었다고 한다.
지은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현종 11년(1670)에 지어 후에 윤두서가 살게 되었고 순조 11년(1811)에 수리한 것으로 보인다. 지을 당시에는 문간채와 사랑채 등 48칸 규모였다고 하나, 지금은 안채와 곳간채·헛간·사당만이 남아있다.
ㄷ자형의 안채는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고, 북서쪽에 위치한 광의 남측지붕은 앞면이 사다리꼴 모양인 우진각지붕이다. 바닷바람의 영향을 막고자 지붕을 높이 쳐들지 않고 푹 덮었으며, 벽은 방의 용도에 따라 회벽과 판자벽을 조성하였다.
문인화가의 옛집으로 조선 후기의 건축수법이 잘 남아있는 유서깊은 전통주택이며, 인근마을에 해남 윤씨의 기와집 10세대가 있어 더욱 옛스러운 정취를 풍기고 있다.
※ 위 문화재는 일반적으로 관람이 가능하나, 소유주 등의 개인적 사정으로 관람이 제한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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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택구조 - 녹우당과 비슷한 ‘ㅁ’자 형태
공재고택은 현재는 안채의 서쪽 한편이 헐리고 ‘ㄷ’자 구조를 하고 있지만 처음에는 ‘ㅁ’자 구조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고택은 윤선도가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 공재가 살았다고 전해오기도 한다. 공재고택은 48칸 규모의 집이였다고 하나 현재는 문간채와 사랑채는 없어지고 지금은 안채, 곳간채, 헛간 그리고 사당만 남아 있다.
안채는 ‘ㄷ’자형의 용마루에 작은 합각이 있는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동쪽 광의 남측지붕은 앞면이 사다리꼴 모양인 우진각지붕으로 되어 있다.
바닷바람의 영향을 막고자 지붕을 높이 쳐들지 않고 푹 덮었으며 벽은 방의 용도에 따라 회벽과 판자벽을 조성하였다
또한 사랑채 앞마당에 작은 인공 연못이 있었고 사당 옆에는 별묘사당도 있었으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공재의 고택은 일제하 무렵에 불이나 원형을 많이 잃어버렸다고 하는데 그 전까지는 고가들이 빽빽이 둘러쳐진 대 전택 이었다.
공재 고택은 안채의 남쪽 중간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있다. 현재 안쪽 중간문은 구조가 변경된 상태인데 이곳을 통해 안으로 진입하면 안마당이 나온다. 안채는 북쪽편에 나있는 부엌을 시작으로 안방, 그리고 강당형식의 3간 대청이 나온다. 그 옆으로 방, 곳간 등이 이어져 있고 부엌 뒤편으로는 헛간이 있다.

* 지형을 고려한 구조 - 경술년에 지어진 집
이 고택의 안채 상량도리 밑 장여에는 (龜 庚戌後百四十二年辛未八月十日?時重修坐卯向酉龍)이라는 중수 상량문이 있다. 이를 통해 이 집은 1670년(경술년)에 처음 지어졌음을 알 수 있고, 142년 후인 1811년(신미년) 8월에 크게 고쳤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670년(현종11)은 공재(1668~1715)의 생존시로 이 연도로 따진다면 공재의 아주 어린 시절에 해당한다.
또 안채의 내림새 기와에는 「同治十年辛未九月重修」라는 명문이 있는데 여기에는 집을 크게 고친지 약 60년 후인 신미년(1871년) 9월에 지붕을 다시 고쳤다고 써있다. 현재 집의 보수로 인해 이 명문기와는 볼 수 없다.
백포 마을 앞으로는 바다가 내려다보인다. 지금은 간척지가 넓어졌지만 예전에는 마을과 바다가 훨씬 가까웠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지형적인 영향으로 인해 공재도 이곳에서 오랫동안 기거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자연적인 특성 때문에 해풍의 영향을 막고자 지붕을 높이 쳐들지 않고 푹 덮은 형식을 하고 있다. 또한 처마는 홑처마 지붕으로 연목만 걸고 있고, 대청마루 위의 가구는 자연스럽게 약간 굽은 대들보를 걸고 그 위에 판대공을 구성하여 장여와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조선시대 문인화가였던 공재 고택은 안채의 평면구성, 두리기둥과 구부러진 퇴보나 대들보의 견실한 결구, 부엌의 앞쪽 툇마루를 찬마루로 이용한 점 등에서 이 고가만의 특징이 나타난다.

* 사당
사당은 안채의 오른쪽 윗 편에 자리하고 있다. 그 바로 곁에는 별묘사당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곳 사당의 벽면에는 민화라고 할 수 있는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사당은 안채의 뒤에 있지 않고 헛간에서 대문으로 나가는 왼쪽에 두었다. 안채의 뒷자리가 협소하거나 지형이 낮을 때에는 이와 같이 안채에서 보아 동쪽을 상징하는 왼편에 두는 때문이다. 사당을 오르는 돌계단 오른쪽엔 소철이 서있고, 왼쪽 담장은 예의 담쟁이덩굴이 덮고 있다. 사당 앞에 소철을 심은 예는 드문 일인데, 소철은 이 고장에서 비교적 잘 자라고 게다가 '강한 사랑'을 상징한다 하니 조상에 대한 흠모의 정을 표명하기엔 좋은 소재로 보기도 한다 .  

* 공재의 애민정신을 배우다
현산면 백포는 공재의 삶의 한 부분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어느 해 심한 가뭄으로 이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게 되었다. 이때 공재는 종가 소유의 백포 뒷산(망부산)에 있는 나무를 베어 소금을 구워 생계를 유지하도록 배려했다는 것이다.
그가 주민들의 구휼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던 인정이 많은 인물이었음을 알게 하는 부분이다.

* 옥에 흙이 묻어 길가에 버렸으니
오는 이 가는 이 흙이라 하는구나
두어라 알아 보는 이 있을 것이니
흙인 듯이 있거라

윗글은 조선 후기의 선비화가 공재 윤두서(恭齊 尹斗緖 : 1668 ~ 1715)가 지은 시이다. 공재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이자 다산 정약용의 외증조부로서 당시  인물화와 동식물에 뛰어나 조선중기 회화의 삼재인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 윤두서를 포함해 '삼재'라 부른다.
공재는 조선 후기 당쟁이 심화되자 벼슬길을 포기하고 전남 해남 연동에서 학문과 서화에 몰두하면서 세상이 흙이 묻은 옥을 알던 모르던 관계치 않고 여유 있는 삶을 추구하였다.
공재는 시· 서· 화는 물론 음악 공예 등 다방면에 능통했고 지리 천문 수학 등 폭넓은 학식을 지닌 실학자였다. 성호 이익(李益)은 공재의 제문(祭文)에서 자신의 형제가 공재로부터 박학다식한 면을 배웠고 그가 세상을 떠나 더 이상 배울 수 없는 아쉬움을 이야기했다는 데에서도 공재의 유식을 알 수 있다.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울에 집을 두고 생활하던 윤두서는 46세 때 (1713년) 서울 생활을 버리고 해남으로 돌아왔고 2년 후 4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해남윤씨 종가에서 소장하고 있는 보물 481호인 ‘해남윤씨가전고화첩’에는 그의 대표작품 ‘자화상’을 비롯 ‘채애도’·‘선차도’·‘백마도’등이 들어 있으며 이 화첩은 산수·산수인물·영모·화조·초충·도석인물·화훼도등 80여점d의 작품이 꾸며져 있다. 또한, 그의 또다른 걸작 ‘노승도’, ‘심득경초상’, ‘출렵도’, ‘우마도권’, ‘심산지록도’는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참고문헌: 해남군의 문화유적길라잡이(김승기), 1986. 해남, 정윤섭 향지사 997, 해남의얼, 해남군의문화유산, 땅끝해남등.
문화재정보
- 유형 : 중요민속문화재
- 지정번호 : 232호
- 지정일자 : 1996년 2월 13일
- 시대 : 조선시대
- 종류/분류 :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 수량면적(보유종별) : 일곽 2,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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