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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산미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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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산미황사

  • 위치 : 해남군 송지면 미황사길 164
  • 문의
    문화관광과 문화재담당 061-530-5856: / 해남 관광안내: 061-532-1330 / 061-530-5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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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해남 달마산 미황사 일원 (海南 達摩山 美黃寺) / 명승  제59호
달마산은 삼황(三黃)이라고 하는데 불상과 바위, 석양빛이 조화를 이룬 것을 말하며, 바위병풍을 뒤로 두르고 서해를 내려다보는 자리에 있는 미황사는 신라 경덕왕 8년(749년) 창건 이후 각종 역사 문화적 유적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달마산 경관과 조화를 잘 이루는 풍치 절경의 산사이다.
도솔봉-달마산 능선에서 내려다보이는 남해의 섬과 미황사, 달마산 일대의 수려한 경관, 산능선부에 풍화에 매우 강한 규암층이 길게 노출되면서 발달한 흰색의 수직 암봉들이 병풍같이 늘어서 있어 자연경관이 뛰어난 경승지이다.

* 자세히보기
* 달마대사의 전설이 깃듯  달마산미황사
명승 59호로 풍광이 뻐어난 송지면 서정리에 위치한  달마산(達摩山,489m)자락에 자리 잡은 미황사는 대흥사의 말사로 위도 상 우리나라의 가장 끝에 자리 잡고 있으며 달마산의 끝자락이 땅끝으로 이어진다.
달마산은 두륜산의 끝자락에 이어진 산으로 이곳의 지맥이 바다를 통해 한라산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미황사는 병풍같이 펼쳐진 수려한 달마산 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석양에 해지는 낙조의 모습과 함께 3황(3가지 아름다운정경)이 있을 정도로 산경의 모습이 뛰어나기도 하다. 달마산은 멀리서 보면 마치 긴 공룡의 등을 연상시키는 산등성이의 온갖 기암괴석으로 인해 미황사를 뒤로한 산이 수 십 폭의 병풍을 펼치고 있는 듯 그 자연의 모습이 수려하다.

* 달마산 금샘
달마산은 기기묘묘한 산의 모습처럼 신비스러운 것들도 많다. 그 중에 하나가 누른빛의 금가루가 떠있는 듯한 금샘이다. 금샘은 문바위재라 불리는 정상부근에서 동쪽으로 가파른 고갯길을 60m쯤 내려가면 큰 바위틈에 있다.
마치 금가루가 뿌려져 있는 듯하나 떠보면 물만 떠올라 그 신비함을 더 느끼게 한다. 이 금샘에 관한 기록이 「동국여지승람」에 나온다.
<전라도 낭주(郎主)의 속현을 송양현(松陽縣)이라 하는데 실로 천하에 궁벽한 곳이다. 그 현의 경계에 달마산이 있는데 북쪽에는 두륜산이 접해있고 삼면은 모두 바다에 닿아있다. 산꼭대기 고개 동쪽에 있는 천길이나 되는 벽아래 미타혈이라는 구멍이 있는데 대패로 민 듯 칼로 깎은 듯한 것이 두세 사람은 앉을만 하다.
그 구멍으로부터 남쪽으로 백여보를 가면 높은 바위아래 네모진 연못이 있는데 바다로 통하고 깊어 바닥을 알지 못한다. 그 물은 짜고 조수에 따라 늘었다 줄었다 한다...>

* 미황사 위치와 창건
미황사의 창건과 관련하여 이에 관한 기록으로는 1692년(숙종 18)에 병조판서를 지낸 민암(1634-1692)이 지은 미황사사적비가 있다. 미황사의 옛 통도사터에 있는 이 사적비는 창건시기와 창건연기설화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이곳에는 749년(신라경덕왕 8년)에 의조화상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선조 30년(1593)정유재란시 일부 소실되어 그 다음해인 선조31년에 석만선이 중창하였고 그 후 헌헌 원년에도 3창이 이루어 졌다.
미황사는 고려시대 지원년간(旨元年間)(1264~1294)에 남송(南宋)의 달관(達官)․군자(君子)등이 미황사에 내왕하기도 하며 부흥기를 맞았으며 조선전기에도 그 사세를 꾸준히 유지해왔다.
미황사의 조선시대 연혁은 1754년(영조30)에 기록된 「미황사법당중수상량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상량문은 1982년 대웅전과 응진당 복원공사 때 발견된 것으로 내용을 보면 임진왜란 이후 3차례의 중건이 있었다고 한다.
첫 번째 중건은 1597년(선조30)정유재란 때 건물의 일부가 소실되어 다음해부터 공사를 시작 1601년에 마무리되었다. 이때의 불사는 만선(晩善)스님이 담당했다.
그 뒤 1658년(효종9)에서 1660년(현종1)까지 두 번째 중창이 이루어졌으며, 이때는 성간(省侃)․수신(修信)스님이 담당했다. 그리고 세 번째는 1751년(영조27)에 덕수(德修)스님에 의해 시작되어 상량문이 씌어진 1754년에 마무리되었다. 이때의 불사내용은 1751년에 동서 양쪽에 금고각(金鼓閣)을 세우고 이듬해 기와를 바꾸었으며   1751년에는 보길도에서 목재를 실어 왔고 대흥사와 마을에서 공사를 도왔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듬해 대웅전과 나한전을 완공했다.
1754년(영조30)에 석여고(女古)가 4번째 중창을 하였으며 당시 대웅전의 대들보에서 묵서명이 나왔다. 그 기록에 의할 것 같으면 나한전(응진당)은 1761년(건륭16년)3월 26일에, 대웅전은 같은해 4월 11일에 각각 상양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로 보아 대웅전과 응진당은 18C에 건립된 전각임을 알 수 있다.

18세기에는 고승 연담유일(蓮潭有一)스님이 이곳에 머무르며 활발한 활동을 폈다. 스님은 특히 절이 바닷가에 위치하는 지역적 특성에 따라 물에 빠진 사람의 영혼을 구제하기 위한 수륙제를 지내기도 했다. 그래서 연담 스님의 문집인 「임하록(林下錄)」을 절에서 1799년(정조23)에 펴냈으며 스님의 입적 후 부도가 세워지는 등 스님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19세기 후반인 1858(철종9)에는 영허의현(靈虛義玄)스님이 이곳에서 만일회(萬日會)를 개설하기도 했다. 이때의 만일회는 아미타신앙의 법회였다고 하며 이 같은 내용은 초의선사가 지은 『미황사만일회기』를 통해 알 수 있다.
미황사는 이러한 융성을 거듭하다 이 고장 북평면 출신 주지인 혼허(渾墟)가 절의중창을 위해 모금차 군고단을 이끌고 완도 청산도를 가다 배가 조난당하여 젊은 승려들이 몰살당한 후 군고단 준비에 진 빚 때문에 쇠퇴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청산도 사람들은 미황사스님들이 빠져 죽은 그 바다에서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 날이면 궁고 치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미황사 스님들의 12채 군고(진법군고)는 송지면 산정리 마을 사람들에 의해 전승되고 있고, 진법군고의 깃발에는 바다거북이 등에 올라탄 삿갓 쓴 스님이 그려져 있다.

미황사에는 현재 고승들의 부도가 28기, 탑비가 6기가 경내에 있어 조선후기에 활발한 전법도장(傳法道場)이었으며 사격(寺格)이나 사세(寺勢)가 매우 융성하였음을 보여준다.
현재 경내에는 대웅보전과 응진당, 명부전, 산성각 , 자하루 그리고 요사채 등이 남아 있으며 옛날에는 통교사를 비롯하여 전각이 20여동이나 있었던 대 사찰이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해남군의 문화유적 1986. 해남, 정윤섭 향지사, 1997. 해남의 문화유산, 해남군사, 해남의얼, 해남금석문집 미황사사적비 기록문, 미황사 응진당 단청집, 미황사 대웅보전 단청집, 땅끝해남 등

* 문화재 정보
종 목: 명승  제59호
명 칭: 해남 달마산 미황사 일원 (海南 達摩山 美黃寺)
분 류: 자연유산 / 명승/ 역사문화명승/  
수량/면적: 4,619,039㎡
지정(등록)일: 2009.09.18
소 재 지전남: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247 등
시 대
소유자(소유단체)
관리자(관리단체): 해남군
사진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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