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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의 미륵불을 찾아서 -  배움있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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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의 미륵불을 찾아서 - 배움있는 여행

  • 위치 :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길 400 외
  • 문의
    문화관광과 문화재팀 : 061-530-5227 / 관광안내: 061-532-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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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해남의 미륵불을 찾아서
해남지역에 조성된 석불 중에서는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 외에도 석불은 주로 미륵불의 형태로서 조성된 것을 볼 수 있다. 해남의 미륵불로는 고도리 호천리미륵, 계곡 성진미륵, 해남읍 남천리미륵, 산이면 송천리미륵, 산이면 업자리 미륵등과  또 해남읍 신안리에는 입상의 석불이 있으며 이외에도 황산면 연당리와 산이면 송산리에도 석불이 있다. 이들은 대체적으로 민 불의 형태를 하고 있어 조선시대 불교가 민중화되면서 나타나는 불상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경주에는 석굴암 본존불 - 대흥사에는 북암마애여래좌상
경주에 풍부한 표정과 미소 입체감을 지닌 석굴암의 본존불이 있다면 대흥사에는 북미륵암마애여래좌상이 있다. 대흥사 마애여래좌상은 고려 전기에 조성된 마애 여래좌상 중 가장 풍부하고 아름다운 표정과 입체감을 간직한 불상으로 평가받고 있다.
산 정상 바위에 이 거대한 불상을 누가 새겼을까? 이렇게 단단한 바위에 섬세하게 조각한 이는 누구일까?. 아마 이 불상을 새겼을 장인은 미륵불이 도래하길 간절히 원했나보다. 미래불이 빨리 와 우리를 구원해 주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커 이렇게 큰 불상을 조각하지 않았을까?  이 불상의 전각은 용화전이다. 용화전은 미래불인 미륵불을 모신 전각으로 용화수 밑에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고뇌하고 있는 불이 미륵불이다.

*북암 마애여래좌상은 최근 자신의 모습을 찾았다.
그동안  자신의 몸짓보다 작은 전각에서 살았기 때문에 전체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처럼 풍부하고 아름다운 표정의 본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그런데 용화전의 해체 보수로 그의 전면이 드러났다. 그 신비함에 모두 숨을 죽이고 말았다.
그토록 풍부한 표정과 입체감은 보는 이들을 사로잡았다. 그 딱딱한 돌에 저토록 풍부한 질감과 입체감을 나타낼 수 있었던 장인의 대단한 정신에 압도됐다. 마애여래좌상은 그 신비함 만큼 신비한 전설이 전한다.

*천녀가 새긴 마애여래 좌상
아주 옛날 옛적 옥황상제가 사는 천상에는 천동과 천녀가 살고 있었다. 부족함이 없는 천상생활은 천동과 천녀에게는 낙원이었다. 매일 매일 행복에 겨운 나날을 보내던 천동과 천녀는 어느 날 천상의 계율을 어기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천상의 계율을 어기는 행위만큼은 옥황상제로부터 용서받기 힘든 일이었다. 결국 이들은 천상에서 가장 큰 벌인 하늘에서 쫓겨나는 벌을 받고 말았다. 대신 하늘로 다시 돌아오는 방법도 제시해 줬다.
하루 낮 동안 바위에다 불상을 조각해야 하는 정말로 고되고 힘든 방법 이었다. 지상에 내려온 둘은 두륜산에 있는 천년수를 발견한다.“그래 저 나무에 해를 매달아 놓는 거야.”이들은 재빨리 하루해가 지지 못하도록 하늘에 떠 있는 해를 붙잡아 천년 수에 매달았다. 그리고 천녀는 북쪽바위인 북 암에 불상을 조각하고 천동은 남쪽바위인 남 암에 불상을 조각하기 시작했다.
시간은 자꾸 흐르고, 서쪽으로 져야할 해를 언제까지 천년 수에 매달아 놓을 수는 없는데 불상 완성은 더디기만 했다. 북암에 불상을 새기기로 한 천녀는 정성을 다해 앉아있는 불상을 새긴다. 불상이 완성되자 천녀는 서둘러 해가 매달려 있는 천년수 나무 밑으로 달려가지만 천동은 오지 않는다.
그 시각 천동은 해  서 있는 불상을 완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조각한다. 그러나 서 있는 불상의 완성은  쉽게 되질 않는다. 그 시각 천년 수 아래서 천동을 기다리는 천녀는 하염없이 기다릴 수 없어 천년 수에 매달린 해의 끈을 자르고 하늘로 올라가 버린다. 천년 수에 매달린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버리자 천동은 눈물을 머금고 일손을 놓아야 했다.
그가 조각하기 시작했던 불상도 완성되지 못한다. 실지 남 미륵 암에 조성된 미륵은 희미한 음각의 표현이어서 그런지 미완의 미륵처럼 보인다.

*국보 - 해남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
천녀가 새겼다는 대흥사의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은 국보(308호)로 지정돼 있다.
얼굴이나 각 부위의 조각된 고부조(高浮彫)되어 있는 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 전반기인 11세기경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불상의 전체높이가 5.2m나 되는 거대한 불상으로 한국의 마애불상 중에서는 그 예가 매우 드물고 뛰어난 상으로 평가된다.
마애여래좌상은 4구의 공양천인상이 함께 표현된 연꽃위에 앉아있고 수인(손모양)은 항마촉지인(악마를 굴복시키는 수인)으로 석가여래가 모든 망상을 물리치고 깨달음을 얻는 순간의 자태를 표현하고 있다.
본존불의 육계(肉髻)와 민머리(素髮)처럼 보이나 나발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단정한 얼굴은 살이 찌고 둥글넓적하여 원만한 상이나 근엄한 인상을 풍긴다. 귀는 큼직하며 굵고 짧아진 목에는 선으로 삼도(三道)를 나타내었다.
손(手印)은 항마촉지인에 오른 발을 왼 무릎 위로 올린 길상좌(吉祥坐), 낌을 준다. 법의(法衣)는 양어깨를 다 덮은 통견의(通肩衣)로 그 주름은 거의 등 간격으로 선각화(線刻化)하는등 도식적(圖式的)인 면이 강하다. 이는 통일신라 말기로부터 고려시대로 이행해 가는 변화과정을 잘 보여준다.
대좌(臺座)는 11엽의 앙련(仰蓮)과 12엽의 복련(覆蓮)이 마주한 연화대좌로 불신(佛身)과 더불어 부피감이 두드러져 보이며, 다른 예에서와는 달리 자방이 높게 솟아올라 있어 특징적이다. 머리 광배(頭光)와 몸 광배(身光)는 세 가닥의 선을 두른 3중원(三重圓)으로 꾸밈 없이 테두리 상단에만 불꽃무늬(火焰紋)가 장식되어 있다, 그 바깥쪽에는 위·아래로 대칭되게 4구의 천인상을 배치하였다.
본존불과 달리 경주 석굴암 내부 감실(龕室)의 보살상을 연상케도 하는 4구의 천인상은 날렵한 모습으로 부드러움과 함께 세련미가 엿보인다. 천인상들의 조각표현은 이 당시의 거의 유일한 예이자 우수한 조형미를 반영하는 수작으로 평가된다.
대흥사 북안마애여래좌상은(국보308호) 고려불교의 전성기 때 만들어진 사찰미륵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우리가 현재 바라보는 모든 작품들은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다.
호족세력이 득세하거나 무인정권이 들어섰을 때의 작품들은 조화보다는 크기로 위용을 자랑한다. 반대로 사회가 안정되고 풍요로울 때는 가장 조화롭고 균형 잡힌 작품이 등장한다. 그러나 사회가 혼란했을 때도 작품을 남긴다. 몽고의 침입 때 만들어진 고려팔만대장경과 화순 운주사 석불상 등은, 불심의 힘으로 어려운 현실을 타계하려는 의지가 담겨진 작품들이다.
그 외 문화유산 중 대흥사 석가모니불의 미소와 너무도 닮은 석굴암본존불의  석가모니상과도 아름다운미소로 정평이나 있으며,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국보 제78호 금동반가사유상, 일본국보1호인 광륭사의 불상 등도 한국인의 미소를 알린다. 또 백제의 상징으로 온화하고 넉넉한 표정을 담은서산의 마애삼존불의 미소도 우리를 환희로 이끈다. 서산의 마애삼존불의 미소는 어떤 철학적인 의미를 함축하기 보다는 그야말로 해맑고 티 없는 미소이다.  

*미륵이란
미륵이라는 말은 범어로 마이트레야(Maitreya)로서 자씨(慈氏)보살이라고 불린다. 무승(無勝) 또는 막승(莫勝)이라고도 한다. 석가모니부처님의 뒤를 이어 오실 부처님으로 현재에는 도솔천 내원궁에 천인들을 교화하고
계시다가 56억 7천만년 후에 화림원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하시고 3회에 걸쳐서 설법을 하시어 300억의 중생을 제도 하신다고 한다.
이 때 이 용화삼회에 참석하여 깨우침을 얻으려는 모임이 미륵하생 사상이며, 이 시간이 너무 긴 것을 알고 미리 미륵보살님이 계시는 도솔천에 올라가 모시고 있다가 미륵부처님으로 내려오실 때 따라 내려와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사상이 도솔상생 신앙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 대표적인 미륵은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서산마애삼존불중 좌우협시보살이 유명하다.

❍그 외 해남의 미륵불
이 외에도 석불은 주로 미륵불의 형태로서 조성된 것을 볼 수 있다. 해남읍 고도리 호천마을 뒤 밭 가운데에는 두 동강이 난 석불이 음각으로 조성되어 있다.

❍두 동강난 호천리미륵
해남읍 고도리 호천마을 뒤편인 말매봉 서쪽 기슭아래 밭에는 두동강이나 겹쳐져 있는 미륵이 있다.
고도리 마애불은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힌 듯 하지만 조각기법이 도식적이고 간략화 되어 있어 조성시기를 고려 말이나 조선시대 초로 보고 있다.
이 미륵은 평평한 바위면에 음각으로 좌상(坐像)을 표현하고 있으며 음각으로 새긴 조각기법이 대흥사 남미륵암에 새겨진 미륵과 매우 흡사하다. 이러한 조각기법 때문인지 만들어진 시기를 고려말기나 조선초기로 보고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가로1.1m, 세로 1.8m크기로 음각으로 조각한 탓인지 선명한 형태로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두 동강 나있어 전체 형태를 알아보기 어렵다. 이 미륵이 두동강 난 데에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다.
이 미륵은 원래 남쪽 방향을 바라보고 서 있었으나 이 미륵이 자기마을을 바라보고 서 있어서 재앙이 발생한다고 생각한 남쪽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이 미륵을 쓰러뜨려 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이 미륵이 서 있어야만 마을에 좋은 일이 생긴다하여 미륵의 북쪽인 고도리 사람들이 다시 미륵을 일으켜 세웠고, 그러자 다시 남쪽마을 사람들이 와 쓰러뜨리면서 가슴부분이 깨어져 두 조각이나 지금은 일어서지 못하는 미륵이 되어버렸다.
이곳도 흔히 미륵이 있는 곳에 붙여지는 지명인 ‘미륵등’이라는 이름이 지금까지 불려지고 있어 아주 오래 전에 미륵이 조성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아들 점지해 준 미륵불 - 계곡성진마애불
계곡면 성진리 속칭 말삼정이란 곳에는 큰 바위에 희미하게 조각된 미륵불이 있다. 성진리 마애불은 전형적인 조선시대의 민불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아들 점지해 준 미륵불 설화
아들을 점지해 주는 부처로 유명했던 계곡면 성진리 미륵불 그 미륵불 덕에 000씨 집안은 대대로 아들 복이 터졌다고 한다.
길가에 세워졌던 이 미륵불은 계곡출신 민영남씨 모친과 부인에게 아들을 점지해 준 부처로 유명하다.
민영남씨(전 국회의원이자 전남도지사) 모친은 내리 딸만 8명을 낳게 되자 계곡 성진의 미륵불을 찾아가 아들을 점지해 달라는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치성을 드린 후 이 부인은 기적적으로 아들 셋을 두게 되었고 마지막으로 딸 하나를 더 얻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들인 민영남씨가 장가를 들어 아이를 낳기 시작하는데 아들도 내리 딸만 다섯을 낳으니 이것을 본 모친이 안타까워 며느리에게 미륵불에 가서 치성을 드리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며느리도 치성을 드린 후 내리 5명의 아들을 얻었다는 것이다.
이때 추운 날씨에도 아들을 얻기 위해 미륵불에 치성을 드리는 며느리가 안타까워 시아버지가 미륵불 옆에 건물 한 채를 지어 주었다고 한다. 이 관리사에는 미륵불을 관리해줄 관리인을 두었는데 민씨 집안에서는 관리인에게 미륵불을 잘 봉안하라는 의미에서 밭과 논까지 주었다고 한다.
또한 대를 이어 아들을 점지해준 미륵불이 너무도 고마워 민영남씨 부친이 보호 각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모진 비바람을 맞으며 논 가운데에 덩그러니 서 있던 미륵불은 이때 집을 마련했고 그 후 민영남씨에 의해 다시 한 번 새 집으로 단장하게 된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흐르고 민영남씨 가족도 서울로 떠나자 이 미륵불의 건물은 쇠퇴하기 시작해 얼마 전 아예 주저앉고 말았었다. 이에 군이 서둘러 새 집을 마련해 준 것이다.
어찌되었건 이 미륵불이 아들을 점지해 준다는 소문이 퍼지자 아들 낳기를 염원하는 아낙네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영험하다는 소문까지 퍼져 초파일 때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한편 커다란 바위 등에 새기는 미륵불은 고려 말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러 수없이 많이 조성되었는데 당시 민중들은 미륵이 하생 해 새 세상을 열어줄 것을 염원하는 의미에서 길거리 여기저기에 미륵불을 세웠었다.

❍황산면 연당리 미륵불의 영험(靈驗)-
연당리 미륵불은 연당리 입구 우측 도로변에 용화당에 모셔져있다.
이곳 미륵불은 입상으로 높이 205cm, 두고 54cm, 흉폭 43cm, 견폭 85cm, 이다. 미륵불의 수인은 여원인, 선정인이라 하지만 손상이 심해 선명하지가 않다.
원래 미륵불은 암, 수 한 쌍이였으나 암 미륵은 땅에 묻히고 현재는 수 미륵만 남았있다.  수 미륵이 워낙 영험한지라 전라 우수영의 우수사가 이곳을 지날 때 말에서 내리지 않고 그냥 가다가면 다리가 부러진다는 설화가 전해온다.
이곳 황산면은 옛날에 통신 및 도로관리, 군사정보를 위한 남리 역이 있었고 관리의 여행이나 숙식, 행정 연결수단으로 활용하던 삼지원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 미륵불 전설
미륵불은 왼쪽귀가 떨어져 나가고 없는 데 여기에 따른 전설이 있다. 조선시대에 아주 잘 나가던 양반이 있었는데 그의 나이 50이 넘어 가는데도 그에게는 슬하에 아들이 없었다. 그는 국 방방곡곡 명산대천 천지신명은 물론 모든 사찰을 찾아 부처님께 기도를 하며 아들하나 점지해 주실 것을 빌고 또 빌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양반의 꿈에 스님이 나타나 이르기를 "전라우수영으로 가서 미륵불을 조성하라" 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꿈에서 깨어난 그는 기이한 꿈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꿈을 잊을 수가 없어 스스로 조정에 해남으로 갈 것을 자처하고 전라우수사로 부임하게 된다.
전라우수사로 부임하던 중 마을 입구에 연꽃이 곱게 피어난 곳을 보고는 이곳에 미륵불을 조성해야 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다. 그러나 욕심이 많았던 우수사는 자기 돈은 내지 않고 마을 주민들에게 전액 부담을 주어 미륵불을 조성하게 했다.
그 후 우수사는 아들을 갖게 되어 매일 매일이 더 이상 바랄 것 없는 행복이었다.
그러나 그 행복도 잠시 10여년이 지난 어느 날 아들은 이름 모를 병에 시달려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된다. 이에 화가 난 우수사는 미륵불을 산산조각을 내려 했으나 왼쪽 귀만 떨어져 나가면서도 미소를 짓고 있음이 더욱 화가 났다. 화가 난 우수사는 완전히 깨 없애려고 하인들을 시켜 "아주 부셔 버려라"하고 호령하자 갑자기 하늘에서는 시커먼 먹구름이 일어나드니 천둥번개가 치면서 날 벼락이 일어 인부들이 죽고 만다.
이 후로는 사람들은 감히 미륵불을 건드리지 못하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전라우수사 만 이곳을 지날 때 말에서 내리지 않으면 다리가 부러졌다는 설화가 전한다.

*미륵불: 미륵부처라고도 하는데 도솔천에 살며 56억7천만년 후에 미륵불로 나타나 세 번의 설법을 통해 중생을 구제한다고 전해온다.
*도솔천(兜率天) : 수미산 정상에 위치하며 석가모니 부처가 보살로 계실 때 이곳에 계신 곳이며 미륵보살도 미륵부처가 되기 전 까지 이곳에서 수행을 한다고 한다.
*수미산(須彌山) : 불교에서의 우주관으로 수미산이 그 중심이다.

❍송천리 미륵불
산이면 송천리 미륵은 면소재지인 초송리를 약간 못 미친 송천리 마을의 도로 옆에 있는 조그마한 사찰인 미륵사에 모셔져 있다. 대부분의 마을미륵이 들판에 서있는 것처럼 송천리 미륵도 들판에 있었다. 미륵불 주변에는 일곱석상(일명 칠성바위)이 있었으나 밭 개간시 매몰되었다고 한다.
이곳도 여느 곳처럼 미륵불 앞의 언덕진 곳을 미륵 등이라고 하며 미륵불을 모신 전각 옆에는 불당이 지어져 있다.
이곳에 모셔진 미륵불은 높이 2.4m, 폭 2m의 비교적 평평한 자연석 바위에 좌불을 하고 있는 불상을 새겼으며 미륵불의 얼굴과 상체부분은 마모되고 떨어져 나가 알아보기 힘들다.
이곳 미륵사에 모셔져 있는 미륵불이 계곡면 말삼정 미륵처럼 자연석 위에 엷게 음각의 좌불로 조각된 미륵이어서 매우 일치된 형식을 보여준다.
이 미륵불에도 예전부터 내려오는 전설이 있다. 그것은 이곳 송천마을의 미륵불이 영암군 미암면에 소재한 미륵불과 마주보고 있어 이를 마주보면 산이면 총각은 문등병, 미암면 처녀들은 정신병에 걸린다고 믿어 마을에서는 영암의 미륵불이 보이지 않도록 앞쪽 구릉에 소나무를 심었다는 이야기다.
현재 영암군 미암면의 경계인 학계리에는 민가의 정원에 입상의 미륵불이 있다.

❍산이면 업자리 미륵 등 전설
산이면 업자 마을에는 마을로 들어오는 고갯 목에 있다가 지금은 없어진 미륵에 관한 전설이 전해져 온다. 옛날 아주 옛날 이 마을에는 부(夫)씨 노인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 부씨 노인은 소문난 부자였지만 심술이 고약했고 인색하기 이를 데 없는 노인이었다. 부씨 노인 집은 부자 집 이었기 때문에 하루에도 수 십 명씩 구걸하러 오는 걸인들이 찾아왔다. 그러나 부씨 노인은 성격이 인색하고 포악했기 때문에 적선을 해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노인이 부씨 노인에게 동냥을 구걸하러 왔다. 이 노인은 부씨노인이 구두쇠라는 것을 알았지만 동냥을 청했다. 대문간에서 동냥을 청하는 소리에 부씨의 마누라가 나왔다. 부씨 마누라 또한 부씨노인에 못지않게 인색하기로 유명해 동냥하러 온 노인을 마구 구박하며 하인을 시켜 내쫓아 버렸다.
부씨 노인부부는 날마다 이렇게 찾아오는 걸인 때문에 어떻게 하면 이들의 등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를 궁리했다. 그리고는 한가지 묘안을 짰는데 그것은 주둥이가 좋은 항아리에 쌀을 반쯤 넣고 걸인들이 오면 마음대로 한줌씩 퍼가도록 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며칠 후 부씨노인 집에 한 스님이 동냥을 하러왔다. 그리고는 적선을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부씨노인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스님에게 주둥이가 좁은 항아리에서 손을 넣고 쌀을 가져가라고 말하였다. 스님은 그 말을 듣고 손을 넣었으나 주둥이가 좁았기 때문에 쌀을 빼낼 수 가 없었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부씨노인은 욕심이 많아서 쌀을 너무 빼내려고 하기 때문에 그런다고 놀려댔다. 스님은 그제야 부씨 노인이 얕은 수작을 부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는 “대청마루 밑에 있는 미륵불을 산 위에 세워놓으면 지금보다 더 훨씬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텐데...”하고 혼잣말을 하며 총총히 사라져 버렸다.
이 말을 들은 부씨노인 부부는 더 부자가 된다는 소리에 하인들을 시켜 마루 밑을 파보게 하였다. 그랬더니 과연 그곳에서는 서기가 서리더니 미륵불이 나왔다. 두 부부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하인들을 시켜 산 위에 미륵불을 세운 다음 돌아왔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부씨 노인이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힘없이 쓰러져 버렸다. 그리고는 잠시 후에 부씨 마누라 마져 땅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부씨노인부부는 이후 시름시름 앓다가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부씨노인 부부가 세상을 뜨자 가세도 점점 기울어 나중에는 집터만 남게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노인의 집터가 있었던 곳을 큰 마을이라 부르기 시작했고 부씨노인 부부가 너무 못되게 굴다가 벌을 받아 죽었다고 하며 마을 사람들은 나쁜 일을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세워진 미륵불이 마을 앞산 기슭에 옮겨와 세워져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찾을 길이 없고 미륵이 있었던 곳에 ‘미륵등’이라는 지명만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남천리 미륵
해남읍 남천리 미륵은 어찌 보면 제주도에서 볼 수 있는 돌 하루 방같이도 보이며 어찌 보면 석 장승 같기도 한 미륵으로 남각산 아래 남천마을 서쪽입구 길가에 서있다.
약 1.2m 높이의 자연석 바위에 새긴 모습이 굉장히 친근하게 느껴지는 미륵이다. 마을 사람들은 미륵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자연석 바위에 얼굴부분과 상체가 양각으로 꽤 뚜렷하게 조각돼 있다.
둥그런 두눈을 또렷하게 뜬 모습에 아래 부분은 치마를 내려뜨린 형태로 돼 있어 마을 사람들은 이 미륵을 암 미륵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이 마을 건너편 서쪽 오인리에 있는 수 미륵과 한 쌍을 이루었다고 하나 지금은 찾아보기 어렵다.
남천리 미륵은 해남에서 가장 전형적인 민 불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불상하고는 거리가 먼 투박하고 소박한 모습이 해남인의 모습같이도 느껴진다.

*참고자료:해남군사, 황산면지, 계곡면지, 해남의 문화유산, 전통사찰총서(사찰문화연구원, 1996)
땅끝해남. 해남군의 문화유적, 한국의문화유산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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