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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는 백과사전 - 미암유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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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는 백과사전 - 미암유희춘

  • 위치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구교리 금강산 팔각정 외(해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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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관광과 문예관광팀 : 061-530-5919 / 관광안내:061-532-1330 / 061-530-5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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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은 전남 해남에서 출생하여 중앙에서 활동했던 16세기의 대표적 호남사림이다.
해남읍 해리 출신인 미암 유희춘은 해남과 담양을 오가며 살았던 인물로 미암일기를 남긴 이로 유명하다. 미암은 벼슬을 하면서 자신의 행적뿐 아니라 당시 생활상과 관련된 내용 등을 일기에 자세히 남긴다.
을사사화로 정치는 극도로 혼란스러웠고 정치가 어지러웠던 틈을 타 경제가 균형을 이루지 못해 못살겠다고 아우성치는 백성이 늘어가더니 인심조차 흉흉해졌던 시대, 그 사회를 중간관리 입장에서 안타깝게 지켜본 미암이 19년의 귀양살이 동안 써낸 일기는 조선중기 사회를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지식인의 최소한의 양심표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미암일기는 임진왜란으로 조선왕조실록 한 부분이 소실되자 이 부분을 대신한 사료로 활용되는데 미암일기에는 당시 관가의 생활상과 조선 양반사회 문화가 낱낱이 기록돼 있어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 미암유희춘과  해남 미암바위
해남읍을 병풍처럼 든든하게 받치고 있는 미암 바위는 금강산(미암산)아래에 있는 바위로 두기의 바위가 나란히 있어 형제바위라고도 한다.  미암 바위가 더욱 유명하게 된 데는 미암유희춘(1510~1577년)의 호가 미암이기 때문이며 미암 유희춘의 호는 미암바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 사람들은 4백년이 넘었지만 전설처럼 할머니들이 대대로 들려준 <미암바위> 얘기가 대대손손 전해온다 .
하루는 미암의 어머니가 낮잠을 자는데 짐승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형상을 한 이가 치마 속으로 들어가더니 매일 찾아와 고민하다가 명주실을 발에다 묶어놨더니 그 괴이한 이는 뒷문을  통해 미암산 두 바위 사이로 사라지더라는 것. 그래서 잉태한 이가 유희춘인데 과연 미암 산의 정기를 받은 탓인지 어려서부터 모든 면에서  출중했다는 얘기다.
그 같은 인연으로 호를 미암이라고 했다고 한다.  유희춘이 쓴 미암일기는 현재 보물 제260호로 지정돼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 모현관에 소장돼 있다.
미암 바위는 해남읍 어디에서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팔각정에서 금강산 정상으로 오르는 등산 8부 능선 쯤에 자리한다.  

미암유희춘(1510~1577년)은 당파싸움으로 정치가 어지러웠던 1513년(중종8) 12월 해남읍 해리에서 태어났다. 본래 그의 아버지 계린은 금남최부에게서 수학한 광양인 이었으며 그가 해남으로 터를 옮겨 오면서 미암과 그의 형인 성춘은 이곳에서 태어났다.
미암의 가계를 보면 고조부 문화는 감포만호를 증조부는 진사를 지냈으나 부친은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향리에서 독서에만 열중 했으며 어머니는 김종직의 문인으로 무오사화 때 유배되고 갑자사화 때 처형을 당한 금남 최부의 둘째 딸이다.
미암은 어려서 아버지에게 글을 배웠고 16세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최산두, 김안국에게 사사했다.
특히 김안국에게 큰 영향을 받고 그를 존경했는데 너무 영리했기 때문에 제자로 대하지 않고 동등하게 토론을 폈다고 전해지고 있다.
선산 유씨인 미암은 향교 18현 중 한 명인 하서 김인후와 함께 모재 김안국의 문화 생이 되어 학자의 길을 걷게 된다. 미암의 선생인 김안국은 경기학파로 조광조와 함께 김장생 문화생이었던 사람이다.
같은 선생 밑에서 공부했던 미암과 하서의 일화는 유명하다. 같이 공부를 했지만 먼저 과거에 급제한 미암이 성균관 조교로 있을 때 부득이하게 그 밑에서 공부를 해야 했다. 하서가 전염병에 걸려 사람들과 격리 당하고 있을 때 미암이 극진히 치료해 낫게 했다.
이같이 사람들의 출입이 금지된 집까지 찾아와 친구를 보살핀 우정이 이후 미암이 을사사화로 제주도로 유배 갈 때 서너 살밖에 안된 미암의 아들인 경렴을 하서가 거두었다고 하며 나중에는 사위가 된다.
미암은 성격이 매우 소탈해 집안 안살림에는 소홀했다. 의관이나 수건, 버선 같은 것이 때가 묻고 헤어졌어도 개의치 않았고 거처하는 방도 책상위에 책을 펴 놓은것 외에는 아무리 지저분하고 먼지가 쌓여도 소제할줄 몰랐으나 학문에 대한 것이나 정치하는 도리에는 투철한 소건과 해박한 지식으로 남들이 도저히 생각 못한 것을 토로해 주위를 놀라게 하곤 했다.
미암은 중종 32년 생원시에 합격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 별시병과에 급제한 후 성균관에 보임되고 춘추관, 기사관등을 거쳐 중종 37년에는 세자강원설서에 임명돼 동궁을 돌며 지도하였다.
미암 유희춘은 홍문관 수찬, 무장 현감, 홍문관 교리 등을 지내며 이황, 이이, 허준, 정철 등과 친했던 분이라고 알려져 있다.

❍을사사화와 미암
인종이 죽자 정치는 소용돌이 속에 휘말린다. 명종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해 세력을 얻게된 윤원형 일파가 인종의 외숙인 윤임과 그 일파인 좌의정 유권, 이조판서 유인숙 등을 제거하기 위해 교지를 내려 부정하다하여 반론할 것을 거부했다.
다음날 윤원형은 같은 당파인 임백령 허현 등과 짜고 세 사람의 죄를 고해 교지를 거부한 유희춘 등 대간을 파직하고 을사사회를 일으켰다.
이로 인해 미암은 파직 당하고 이리(지금의 익산)에 칩거한다. 설상가상일까  이듬해 9월 전라도 양재역에서 벽서가 발견, 소위 '양재역벽서 사건'이 일어났다.
전라도 양재역에서< ‘여자임금이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은 아래에서 권력을 농락하고 있으
니 나라가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리는 격이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라는 벽서가 발견된 것.
이를 접한 문정왕후는 이는 죄인들을 가볍게 처벌한 것이 사건의 원인이라는 의견을 내 미암을 제주도에 유배했다가 고향인 해남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조선 최북단 함경도 <종성>으로 이배 시켰다.
종성에서 미암은 19년 동안 유배 생화을 하게 되는데 밤낮으로 깊은 사색에 잠겨 저술을 계속하고 교육에 힘을 기울여 변경지역 주민의 교화에 힘썼다.
이후 명종 20년 문정왕후가 죽고 윤원형 세력이 쇠퇴하자 을사파 죄인들의 사면복권이 일어나 미암은 충청도 은진에 위배되었다가 2년 후에 풀려났다.
미암은 선조 원년인 1567년에 풀려 나와 홍문관교리, 이조판서를 거쳐 학문하는 유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존경받고 선망되었던 관직인 홍문관 부제학에 올랐다.

❍미암의 학문
미암의 학문적 경향은 유학경서에 충실한 경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당시 학문적 풍조였던 유학의 사상적 형이상학적 연구를 중시했던 도학에 대해 그는 탁상공론에 불과한 공허한 학문이라는 비판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일기에도 이 문제를 가지고 퇴계이황과 자주 논쟁을 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미암은 이황 뿐 아니라 율곡과도 자주 접촉, 그의 학문적 견해인 도학을 비판하면서도 서로 책도 교환해서 보고 소감문도 교환하는 등 학문적 교류를 맺었다.
후진양성을 중시했던 도학 학풍인 영남학파들에 비해 미암은 경학을 중시했던 만큼 후학 양성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 문화생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미암은 많은 저술을 남겼다고 알려져 있으나 현재 남아있는 것은 문집 『국조유선록』.『역대요록』2편『동몽구』.『미암일기』등 몇가지이다.

❍살아있는 역사서 미암일기
『미암일기』가 우라나라 역사에 인식된 것은 임진왜란으로 선조초년의 기록이 많이 유실되어 「선조실록」을 편찬할 때 그의 일기가 주요 자료로 이용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선조 25년 이전의 승정일기가 모두 불타버리자 그후 조선실록을 만들 때 이이의 경정일기와 미암일기를 참고하여 선조실록을 꾸몄다.
미암일기에는 위로는 조정의 공적, 사적인 일부터 아래로는 미암 개인의 사생활에 이르기까지 매일매일의 일, 견문한 것 등이 빠짐없이 상세하고도 정확하게 기재되어 있다.
또 명종말 선조초의 여러 가지 사건, 관아의 기능 관리들의 내면생활, 본인이 홍무관 전라도 감사 사헌부 등을 역임하면서 겪은 사실들을 비롯해 당시의 정치, 사회경제 상태와 풍속 등을 기록해 놓았다.

특히 동서분당 전의 정계의 동향과 사림의 동태, 감사의 직무수행, 경재소와 유향소의 조직과 운영, 중앙관료와 지방관료와의 관계에 대해 자세히 써 중요한 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또 실록이 주로 정치에 관한 것만 언급하고 있는데 반해 미암일기에는 선조초년의 조정에 대한 대소사와 일반 백성의 사회, 경제사, 문화사를 이해하는데 필수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미암일기는 1936~1938년에 『조선사료총간』으로 5권에 두주, 방주를 곁들여 간행한 바 있으며 국보 401호로 지정되었다가 1963년 보물 260호로 지정돼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 모현관에 원본이 소장되어 있다.
미암은 해남출신이지만 담양에 유물이 남아있는 것은 미암의 부인인 송씨 부인이 담양 출신으로 미암이 24세 때 결혼과 함께 과거급제를 해 관직에 오르면서 그의 부인이 거쳐를 담양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모현관은 1959년 4월에 준공했으며 모현관이 건립되기 이전에는 미암의 14대손인 고 유대수씨가 가보로 간직해 왔다. 모현관 뒷편에는 미암의 사당이 마련되어 있다.

미암은 현재 해남읍 해리 금강골 저수지옆  해촌사에 배향되어 있다.
미암바위 찾아오시는 길 : 해남읍~ 구교리~ 금강산팔각정~ 오른쪽등산로~ 금강산8부 능선바위
유적 - 해남군 해남읍 구교리 금강산 팔각정 외
참고문헌
내고장 얼, 해남군편찬위원회, 해남군, 해남의 시문학사, 한국문학을 빛낸 해남의 시인들,  한반도의 땅끝을 찾아서, 해남군 문화공보실, 해남군,1996. 해남(문화유적), 정윤섭, 향지사, 1997. 땅끝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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