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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구적 실학자 해금오달운

선구적 실학자 해금오달운

  • 위치 : 전라남도 해남군 계곡면 용지리 (용지사)
  • 문의
    문화관광과 문예관광팀 : 061-530-5919 / 관광안내 : 061-532-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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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 오달운吳達運
* 본관: 동복  / 아호: 해금(海錦) / 생존시대(생몰년): 1700~1747  / 출생지: 해남
조선후기의 실학자인 해금 오달운(1700∼1747년)은 1700년(숙종26) 해남군 청계면(지금의 계곡면)흑석산 아래 용지리에서 시탁의 아들로 태어났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태어 난지 3일 만에 흑석 산의 검은 돌이 모두 흰빛으로 변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해금이 아직 책을 대하기 전 어렸을 때 이웃집 뜰에 감나무가 있었는데 나무에 열린 감마다 그 속에 모두 까만 점이 박혀 있었지만 그 까닭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어린 그가 말하길 '이 감나무 안에 있는 상처로 하여 병들어 있기 때문인데 아마 그 부분에 돌멩이가 들어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듣는 사람들이 이상스럽게 여겨 베어 본즉 과연 그 속에서 돌덩이가 들어 있었다는 일화는 어려서부터 그의 뛰어난 영민 성을 얘기해 주고 있다.
6세에 어머니를 잃고 10세에 영암의 김순행에게 글을 배우고 향시에 급제했으나 과거는 응시하지 않았다. 과거 문체가 고루해서 학문의 풍토를 망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고루한 문체를 써서 자신의 의지를 굽힐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선구적실학자 해금
조선은 18세기에 들어와 지식층 사회에서 사회전반에 걸친 모순과 폐단을 바로 잡으려는 개혁의지가 넓게 퍼져갔고 새로운 사회건설을 모색하는 사회개혁 운동으로서 실학사상이 심도 있게 전개 되어갔다. 당시 호남지방에는 유형원, 이익, 정약용등의 실학자가 많이 있었는데 해금 오달운도 이런 실학시대 지식층중의 한 사람이었다.
해금은 자신의 저서 「해금집」에서 항상 맑은 마음을 위해선 스스로 자기자신을 견제하고 보살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공(公)이란 인(仁)의 도리이고 사(私)란 인욕의 근원이다. 공적인 일을 하다가 그 도리를 잃으면 사가되고 사적인 일을 하다가 그 도리를 얻으면 공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해금은 공인이 철저히 공인의 도리를 다할 때 국가와 사회가 바로 선다고 강조하고 있다.
해금의 저술에는 경제적 실학사상을 담은 <상제상서(上帝相書)>와 <공도회의(公都會議)> <가주전변부의(加鑄錢便否議)>등이 있다.
<공도회의>에서는 과거제의 시행상 모순과 그에 따른 폐단을 지적 특히 농번기인 6월에 과거를 실시함으로써 갖가지 폐해가 작출되고 있다하여 속히 그 시기부터 바꿔져야 함을 주장하고 있으며, <왕패략호남책(王覇略湖南策)>에서는 사회개혁 포부를 가장 확실하게 드러내고 있다.
9개 조목으로 되어있는 「왕패략」에는 교육, 군사, 사회, 토지에 대한 개혁의지가 밝혀져 있다.

해금은 자신의 저서 <해금집>에서 항상 맑은 마음을 위해선 스스로 자기 자신을 견제하고 보살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해금은 실학운동의 전성기인 18세기 말보다 앞서 아직 미개척기인 18세기 초에 벌써 진보적인 사상을 품고 사회개혁 사상을 제시한 선각자적 실학자였다고 할 수 있다.
해금은 실학사상의 선각자적 면모를 갖춘 인물임에 틀림없으나 현재 조명된 평가는 제대로 되어있지 않다.
현재 해금의 탯 자리인 계곡면 흑석산 아래 용지리에는 그를 모신 용지사가 있으며 산이면 대진리에 그의 묘소와 제각이 있다.

❍해금의 관직생활
해금은 해남에서 30세전까지 학문연구와 후진들을 가르쳤으며 이때 이미 향시(鄕試)에 네번이나 장원하였으나 과거시험에 뜻을 두지 않고 나주로 이사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금성산 남녘의 영산강 북편에 서당을 지은 후 10년간 후진양성에 힘을 썼으며 이때 문하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해금은 본래 청백한 성품과 재물을 탐하지 않고 오직 학문연구와 후진들의 지도에만 진력해 생계가 곤궁했다. 이때문에 늙으신 부친의 봉양을 잘해드리지 못한것을 안타깝게 생각해오다가 제자들의 권유로 1740년(영조16) 41세 되던해에 과거에 나가 감시양장(監試兩場)에서 각각 장원하였다.

그 다음 대과의 회시(會試)에서도 장원하여 1년 5장원의 명성을 떨쳤다. 이같은 일은 율곡 이후에 처음 있는 일이어서 더욱 이름이 높았다. 그는 알성급제 하였기 때문에 요로의 인사와 입사대기를 해야 했으나 방이 붙은날 부친이 병환이 났다는 전갈을 받고 그 날밤 귀향하다가 이듬해에 성균관 학유(學諭)로 제수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승정원 사관으로 제수되었는데 당시 유척기 정승이 수차례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다. 이에 임금이 해금에게 유정승을 데려오라는 어명을 내렸다. 해금은 유정승을 만나 학문을 논하면서 고사(古事)를 들어 관직에 복귀하기를 간곡히 권유하며 「삼각산가」와 <관수루기>등 시문을 지어주자 유정승이 매우 기뻐하며 감탄하면서 극진히 예우해 주었다 한다.

양주에서 3개월이 다 될 무렵 시골의 부친이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관직을 떠나 낙향 극진히 병간호를 하였으나 병세가 악화되어 돌아가셨다.
그는 3년 상을 마치고 1746년(영조22) 오수도 찰방으로 제수되어 전라도 남원 임지에 부임하여 관직에는 직위의 고하가 없다고 하면서 역폐를 시정하고 우마를 철저히 관리하며 부하들을 사랑해 사람들이 존경하고 따랐다 한다.
1747년(영조23) 6월 해금은 도회의 시험관으로 나갔다가 더위에 열병이 생기고 평소의 지병이 악화되어 그해 7월1일 세상을 뜨니 향년 47세였다. 그는 나주시 지량면 가척 동에 묻혔다.

❍진보적 개혁사상
교육제도에 대한 개혁에서 해금은 단 한 줄의 글도 읽지 않은 자가 그 이름을 칭탁(稱託)하거나 오륜(五倫)의 조건도 모르면서 성균관에 적을 두어 학문한다는 자들이 있으니 극히 한심스럽다고 하여 부실한 교육풍토를 꼬집었다. 또한 재상의 자제나 일반 서민의 자제 할 것 없이 모두 동일한 조건에서 차이없이 교육되어져야 한다며 교육의 기회균등을 주장하였다.
그는 또한 국가기강을 세우는 것이 개혁의 기초라고 강조하며 인재를 기르는 기본인 「소아교육론」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다. 해금은 과거에 급제하고도 큰 영재 말고는 작문을 못해 남의 손을 빌려 편지를 쓴 자도 많다고 지적하며 어려서부터 어려운 '천자'나 '소시' '사기'를 가르쳐 뜻도 모른 채 외우게 하지 말고 '시경'을 먼저 익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어린이를 가르칠 때 너무 급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너무 급하게 대할 경우 혈기를 펴지 못하여 어렸을 때의 총명이 없어진다고 말한다. 그는 어린이를 가르칠 때 먼저 나의 마음을 안정하고 노기를 가라앉힌 뒤 말을 적게 하고 관대하게 유도하여 진취시켜야 한다며 어린이 교육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했다.
호남 책에서는 18세기초 호남지방의 민정실태를 소상하게 밝히고 여러 가지로 행정상의 작폐와 모순이 가장 혹심함을 지적했다. 그는 여기서 '호남 사람들이 영광스럽게 되기 위해 노력해온 것이 오래지만 아직 그와같이 기미가 없는 것은 국가가 호남을 푸대접해서가 아니라 호남사람들 가운데 중앙 요직에 자리한 사람이 드물어 문제점을 건의하지 못할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라며 호남이 대접받지 못한 까닭을 분석했다.
아들이 있다. 유택은 처음에 나주 지량면 가척동에 마련했는데 후에 그 아들이 산이면 대진리 원항으로 이장했다.
* 유적:용지사

- 해남군 계곡면 용지리 용지사에 제향 / 묘소와 제각  :해남군 산이면 대진리
참고문헌
국역 해금 오달운 문집, 내고장 얼, 해남군편찬위원회, 해남군. 병자호란과 조선, 해남의 시문학사, 한국문학을 빛낸 해남의 시인들,  한반도의 땅끝을 찾아서, 해남군 문화공보실(1996),  해남(문화유적), 정윤섭, 향지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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