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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학의 비조 고산윤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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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학의 비조 고산윤선도

  • 위치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녹우당길 135
  • 문의
    땅끝관광지사업소 고산문학팀: 061-530-5548 / 관광안내: 061-532-1330 / 061-530-5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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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인 윤선도
‘내 벗이 몇인고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긔 더욱 반갑고야···’
국어책에도 실려 우리에게 너무나 낯익은, 고산 윤선도의 ‘오우가(五友歌)’ 첫 대목이다.

*고산 윤선도 <1587~1671년>
고산은 조선중기 대표적인 시조시인이자 조선조 시조문학을 마지막 장식한 대가이다.
그는 시조문학뿐 아니라 철학과, 천문, 지리, 음악, 의약 성리학등 실용적인 학문을 추구한 이로 그의 실사구시적인 학풍은 이후 해남윤씨가의 가풍으로 자리매김 된다.
고산은 실사구시적인 학풍을 추구했던 만큼 아름다운 우리말로 시를 노래한다. 철따라 바뀌어가는 자연의 모습을 아름다운 우리말로 노래한 어부사시사와 오우가 등은 자연을 벗삼아 살아가는 선비의 생활과 서정을, 절제된 언어로 표현한 선비 시조의 최고봉이자 산수 미학의 절정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고산은 또 조선 최고의 조경문화를 남긴 이다.
한국적 미 감각에 의해 창작한 그의 원림은 해남 금쇄동과 완도 보길도 등에 남아있다.
그가 남긴 원림은 순수자연을 그대로 둔 채 거기에 최소한의 인위만을 가미해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창출한 점에서 동양적인 자연관을 보여주며 그의 높은 미적 안목을 느끼게 한다. 고산 생애 대부분은 귀양과 은둔이었고 이러한 그의 불운한 삶이 불후의 명작들을 남기게 했다.
고산의 자는 약이, 호는 고산 또는 해옹이다. 광해 8년(1616) 성균관 유생으로 권신의 횡포를 지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첫 유배 길에 오른다. 인조반정으로 석방된 후 별시문과의 초시에 장원한 후 봉림과 인평대군의 사부가 된다.
병자호란 이후 주로 완도 보길도와 해남 수정동 및 금쇄동에 은거하며 자연에 원림을 짓고 산중신곡과 어부사시사 등 불후의 명장을 남긴다. 그 사이 효종의 부름으로 벼슬에 나아갔으나 당쟁으로 다시 유배되는 등 파란을 겪다 현종 12년 85세로 보길도에서 생을 마감한다. 숙종은 즉위 원년에 고산을 이조판서에 추증하고 충헌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 고산문학산실 -  보길도와 수정동, 금쇄동
완도 보길도와 해남 현산 금쇄동 및 수정동은 고산의 대표적인 문학산실이자 원림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곳이다. 수정동에서는 산중신곡 19수와 속 산중식곡 2수, 기타 5수 등 모두 26수의 시가를 남긴다. 오우가는 산중신곡에 들어있다.
또 금쇄동기에 22개의 지명을 남기는데 모두 그에 합당한 의미를 붙여 이름을 지었다.
보길도는 바닷가에 지은 원림이고 금쇄동과 수정동은 산 속에 지은 원림이다.
고산의 원림문화는 한마디로 동앙의 자연관과 성리학의 사상이 함축돼 있다.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통해 자연과 사람이 하나가 되도록 한 윤선도의 뛰어난 안목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고산은 병자호란 때 왕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주도로 향하다 보길도의 자연경관에 감탄해 머물게 된다.
보길도는 고산이 인조 15년(1631) 51세 때부터 13년간 글과 마음을 다듬으며, ‘어부사시사’등 시가를 창작한 국문학의 산실이다. 또한 그가 섬 안의 바위와 산봉우리에 붙인 이름은 아직도 남아있다.
작품세계
* 고산의 작품세계
고산은 54세∼59세의 6년간 (인조18∼인조23)을 주로 금쇄동에서 기거하였다. 이 기간 동안에 산중신곡과 금쇄동기 등을 지었는데 산중신곡은 산중생활에서 촉발된 감흥을 읊은 것이고, 금쇄동기는 금쇄동의 산수경관을 술회한 것이다.
고산이 산거생활에서 쓴 산중신곡은 고산연보(孤山年譜)에 의하면 임오년(壬午年)56세에 금쇄동에서 18장을 지었다.
고산유고 권6에서도 산중신곡으로 만흥(漫興) 6수, 조무요(朝霧謠)1수, 하우요(夏雨謠)2수, 일모요(日暮謠)1수, 야심요(夜深謠)1수, 기세탄(饑歲歎)1수, 오우가(五友歌)6수등 총 18수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가첩(歌帖) 산중신곡에 고금영(古琴詠) 1수가 함께 수록되어 있고, 가첩(歌帖) 금쇄동집고(金鎖洞集古)에 있는 증반금(贈伴琴)도 수록이 다르지만 금쇄동에서 같은 시기에 지은 노래로 보아 19수, 또는 20수로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고산은 금쇄동에서 기거하며 주로 일상생활에서 시흥(詩興)을 느낀 것과 단조롭기만 했던 생활환경에 변화를 두고 기분을 전환시키는 것, 기후의 변화에 의해서 느낀 흥취와 자연경물(自然景物)에서 소재를 취하여 노래하였다.
* 유물 유적: 고산윤선도유적지, 금쇄동, 해촌서원 배향
참고문헌
내고장 얼, 해남군편찬위원회,  해남의 시문학사, 한국문학을 빛낸 해남의 시인들,  해남(한반도의 땅끝을 찾아서), 해남군 문화공보실 1996. 해남(문화유적), 정윤섭, 향지사, 1997. 해남문화원,1995. 해남윤씨 5백년요람지, 고산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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