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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속화의 비조 - 공재윤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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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속화의 비조 - 공재윤두서

  • 위치 : 해남군 해남읍 녹우당길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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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관광과 문예관광팀 : 061-530-5918  / 관광안내:061-532-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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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활약한 대표적인 선비 화가 윤두서(尹斗緖)는 고산(孤山)의 증손이자 다산 정약용의 외증조부로 자는 효언(孝彦) 호는 공재이다. 시서화 음악 공예등 다방면에 능통했고 지리 천문 수학 등 폭넓은 학식을 지닌 실학자였으며 겸재 정선(謙齎 鄭敾) 현재 심사정(玄齎 沈師正)과 함께 조선후기 삼재(三齋)로 꼽히는 화가이다.조선전기의 관념성을 지향하던 문학예술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사회정치상황의 변화로 실사구시의 새로운 조짐이 싹트기 시작, 진경 산수화와 일반 백성들의 생활과 정서를 반영한 풍속화(風俗畵)가 그려지기 시작한 이 시기에 공재는 활동했다.

*은둔생활
학문에 정진하던 윤두서는 15세에 전주 이씨(李氏)와 결혼하였고 그의 나이 26세에 (1693, 숙종 19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그 당시 서인(西人)이 득세(得勢)하고 있어 남인(南人)계열의 해남 윤씨에게는 뜻을 펴 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때문에 관직의 뜻을 버리고 친구들과 학문에 열중하며 다양한 식견(識見)을 넓혔던 것이다.

그때 교우했던 이들 중 성호 이익(李益)의 둘째형 이서, 심경득과 절친했는데 그의 학문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특히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조선후기 실학을 대성(大成)했던 성호 집안과 공재와의 교우는 후기 실학의 대표적 학자 이익이나 다산 정약용에게까지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성호 이익은 공재의 제문(祭文)에서 두 형제가 윤두서로부터 박학(博學)한 면을 배웠고 그가 세상을 떠나 더 이상 배울 수 없는 아쉬움을 이야기했다.또 정약용도 강진 유배시절 외가인 윤두서의 집에서 책을 빌려 보았다는 기록이 있다. 윤두서의 학문은 증조부 윤선도가 전형적인 성리학자로 이러한 가풍에서 교육받았던 만큼 전통적인 성리학 체제가 남아있어 후기 다른 실학자들과는 달리 당시의 모순과 폐단은 근원적인 성리학의 뜻을 구현함으로써 해결하려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신분적으로는 사대부계층에 속하면서도 특권중심세력에 벗어났던 환경적요인과 이익 집단과의 교류로 현실을 날카롭게 직시하고 개혁을 추구하는 발판이 되었다.

그의 유고(遺稿) 기졸(記拙) 등의 내용을 보면 서두에서도 말했듯이 병법, 음악, 의학,경제, 천문학, 기술 등 현실적인 측면까지 관심이 확대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또한 시문(詩文)에도 재능을 보여 농민들의 일상생활에서 생겨나는 기쁨과 슬픔, 가난하고 서글픈 생활상을 사실적으로 읊고 있다. 또한 그는 '지극히 가난한 자를 구제하기 위해서는 자활에 전력할 수 있도록 조처해 줄것'을 주장하는 등 사대부이면서도 가난한 서민과 불쌍한 노복을 보살펴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렇듯 그가 가졌던 다양한 관심과 분석이 그들이 처한 현실에 대해 통찰(洞擦)하게 하였고, 사회현실에 대한 개혁의지를 제시하게 된 것이다.
작품세계
*작품세계
윤두서는 모든 인간이나 동식물을 그릴때 종일 관찰한 뒤에야 비로소 그려 그의 그림은 사실적 경향을 나타내고 있으며 더 나아가 정신의 표현까지 이르고 있다. 자신의 날카로운 관찰력과 뛰어난 묘사력(描寫力)을 보여주는 공재의 자화상은 안면(顔面) 붓질이 많이 물리는 곳에서 어두운 분위기가 형성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양감(量感)을 느끼게 한다. 가는 선으로 처리된 수염은 안면을 보다 부각시켜서 예리하게 직시하듯 그려진 눈동자와 함께 강한 힘과 생기를 느끼게 하며 거짓없는 외모와 그의 도도한 정신세계(精神世界)를 솔직하게 드러낸 작품으로 동양인의 자화상으로는 최고(最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색하는 선비가 자신의 모습을 떼어놓고 바라본다는 사실 자체가 극한 인생을 성찰(省擦)하는 철학적인 짙은 훈기를 느끼게 한다. 그 털끝하나 소홀히 하지 않는 정기어린 그의 선묘(線描)된 모습에는 사실을 초월하는 동양철학의 아름다움이 서려있다. 이 자화상이 얼굴 이외의 다른 신체는 모두 생략함으로써 자화상의 상징성을 극대화 하였으며 이러한 회화적(繪畵的)단순성(單純性)으로 인해 보는 이의 시선이 공재의 안면에 집중되고 있는데 그의 시선과 보는 이의 시선이 맞부딪히면서 그림의 생명력이 전달된다.
또한 백마도(白馬圖 보물 제481호)는 말이 비대하면서도 단단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정지된 상태에서 뒷다리는 살짝 들어올리는 조그만 변화로 생동감있게 표현했다. '두여인'은 자화상에 다음가는 작품으로 그 역시 높은 수준의 작품이다.

*자화상
조선시대 중기와 후기의 변환기에 활동한 그는 말과 인물화를 잘 그렸는데, 산수화를 비롯해서 회화작품은 대체로 중기의 화풍을 바탕으로 하여 전통성이 강한 화풍을 지녔다. 그의 말그림과 인물화는 예리한 관찰력과 뛰어난 필력으로 정확한 묘사를 보여주며 해남에 종손이 소장하고 있는[자화상 自畵像]이 대표작으로 지목된다.

*수룡화
이 바다용은 우리의 토속적 용신앙과 결탁된 수신으로서의 용으로 보인다. 주목되어지는 것은 용트림으로 일어나는 물거품의 표현기법이다. 이러한 도식적 기법은 고려 사경변상화에서 부터 유래되어 도자기문양에까지 사용되어진다.

*사자나한도
윤두서가 애용한 수하인물형의 구도를 취하여 나무 둥치에 걸터 앉은 나한과 그 옆에 웅크리고 있는 사자형의 동물을 그린 이 작품은 그 주제의 선정과 극채색기법의 사용에서 윤두서의 작품으로는 이례적인 것이다. 윤두서는 이 작품 이외에도 몇 개의 노승도 또는 나한도를 그렸고 윤덕회와 윤용도 때로는 신선도를 그렸기 때문에 이 집안 사람들이 다방면에 폭넓은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확인된다. 윤두서가 나한도를 그리곤 한것에 대하여 해남 주변에 대흥사와 같은 유서깊은 사찰이 있었던 것과 연관시켜 그가 불교에도 관심을 두었을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머리까지 덮는 붉은 외투를 걸친 이 나한은 부리부리한 눈매와 우뚝한 코에다가 귀고리까지 달고 있어 다분히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외투에 새겨진 문양은 은니로 새겨져 있고, 신발 꼬투리의 누런 윤곽선은 금니로 그렸는데, 윤두서는 은니로 산수화를 그린 적도 있어서 이러한 특이한 재료를 사용한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깔끔한 구성과 붉은 색과 흰색, 청색과 양록색 등 화사한 채색의 사용이 무척이나 돋보이는 작품이다.

*심득경초상
공제 윤두서는 「인물에 능력이 편중되어 있고, 산수는 잘하는 바가 아니다」하여 인물에 장기가 있었던 것 같고, 그 기량을 알 수 있는 자료는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나타나 있듯이 숙종이 그 어용모사(御容模寫)에서 공재를 생각했으나 남구만의 반대로 이루지 못한 일등이 있는데 이 그림에서 묘사된 심득경 초상을 사후에 그린 사실 등을 엿볼 수 있다.

*미인도
고산 윤선도의 후손 청고 윤용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미인도는 큰 트레머리관을 양손으로 매만지는 입상으로 간송미술관 소장 지본담채의 혜원의 미인도와 아주 닮은 작품이다.

*유하백마도
공재는 말을 소재로한 그림을 자주 그렸다. 공재는 마벽(馬癖)이 있다 할 만큼 말을 좋아했고 항상 준마를 곁에 두고 길렀는데 여기에서 얻어진 풍부한 식견이 그가 생동감 있는 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원천이 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의 말에 대한 예리한 관찰과 뛰어난 필력은 이 그림 '유하백마도'에서 유감없이 드러난다. 봄 바람이 휘날리는 버드나무 아래서 한가로이 서 있는 유하백마도는 정적인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 작품외에도 윤두서는 '군마도' '노마와지도' '수하마도'등은 윤두서가 즐겨 사용하던 구도와 말의 다양한 자세를 잘 보여준다. 공재의 그림 화풍은 흔히 실학적인 요소가 반영된 실사구시의 정신이 밑바탕에 깔려있다고 하는데 그림을 그릴 때 사물을 보는 예리한 통찰력으로 정확한 묘사를 통해 사실적으로 그렸다고 한다. 공재는 여러 그림에서 실학적인 면들을 엿볼 수 있어 16-18세기 중후반 이후 화단을 풍미한 남종화풍과 풍속화의 선구적 위치에 놓여있다.

공재의 말 사랑은 유별났던지 그가 아끼던 말이 죽자 그는 정성껏 말을 묻어 주었는데 연동 마을입구 소나무숲 있는 곳에 둥그렇게 나와 있는 것을 말무덤이라고도 말하고 있다.

*주례병차지도
윤두서 당대는 실학의 학풍이 휩쓸던 시대였다. 당시 성리학이 교조화되면서 관념적, 배타적인 학풍으로 경도되던 것에 대한 개혁의지의 소산이었다. 따라서 윤두서는 경학 뿐 아니라 천문학과 지리학, 수학 등 실용적인 학문에도 열중하였고 병법, 패관문학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관심을 추구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윤두서는 당시 병서나 국방학 관련 책을 보지 않은 것이 없었고, 전쟁에 관한 진법이나 성을 공격하는 공성 무기에 대하여까지 모두 고증을 했다고 하였다.
이 작품은 '주례병차지도(周禮兵車之圖)' 라고 쓴것으로 보아『周禮』중 병법에 대한 내용을 참고삼아 그려본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에서 윤두서는 형태를 적확하게 드러내는 세밀하고 분명한 선묘로 형태를 잡고 청.녹.홍.백 등의 채색을 하였는데, 두 바퀴를 연결하는 대각선의 축에 나타나는 일관된 시점과 깊이감, 마차와 장수 및 말의 확실한 묘사는 이 그림이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윤두서가 연구한 병차와 전투복식의 설계도면이 아닌가 느끼게 한다.
자연스런 동작으로 표현된 네 마리 말 또한 공간적 깊이에 따라 시선을 자연스레 유도하고 있는데, 이러한 일련의 표현기법은 윤두서가 기하학 또는 서양그림의 원리를 연구한 결과 새로운 개념과 기법을 적용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윤두서가 시도한 이러한 원리 및 기법은 이후 조선 화단에 서양화법을 토대로 한 궁궐도나 책가도 또는 진경산수화가 유행되는데 하나의 시초를 제시한 것으로 그의 [자화상]이나 [선차도], 정물화 등과 함께 윤두서의 진취적인 면모를 보여 준다.

*동국여지지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보다 앞선 우리나라 전도로서 그 시기는 1710년대 전후로 짐작되며 역시 공제 윤두서의 작품이다. 상세하게 그려진 우리나라 전도중 가장 오래된 지도로 우산도와 울릉도가 분명히 나타나 있으며 조선중기의 성, 첨사진, 만호진, 각 고을 등을 종합 망라하는등 세부적이고 아주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이는 지도이다.

*일본여도
일본여도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이며, 당대 최고의 천재화가 공재 윤두서가 숙종의 명을 받아 48인의 첩자를 일본에 보내 수집해온 정보만으로 그린 지도라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소설 일본여도에서는 그 당시 조선조 19대 왕 숙종의 '선남후북벌론'과 48인의 이야기를 다룬 내용이다. 치미애교수의 논문집에는 에도시대의 복사본으로 설명된다.
이 일본여도를 통해 우리는 숨은 역사상의 이야기를 상상할수 있다.

*유적지: 해남군 현산면 백포리 - 윤두서 고택 / 유물: 고산유물전시관: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81
참고문헌
해남의 시문학사, 한국문학을 빛낸 해남의 시인들,  해남역사문화자원 발굴조사(2012), 해남(한반도의 땅끝을 찾아서), 해남군 문화공보실, 해남군, 1996. 해남(문화유적), 정윤섭, 향지사, 1997.땅끝해남 공재윤두서(이내옥),고산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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