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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도의 중흥 초의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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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도의 중흥 초의선사

  • 위치 :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길 400
  • 문의
    대흥사 : 061-534-5502 / 관광안내:061-532-1330 / 061-530-5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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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 해동의 다성(茶聖)을 탄생시킨 일지암
일지암은 해남의 대흥사 본당의 대웅전에서 700m가량 동남쪽 산길을 올라가면(頭輪山. 7부) 능선에 위치하고 있다. 일지암은 조선후기 대표적 선승가운데 한 사람이며 우리나라의 다성(茶聖)으로 추앙 받는 초의선사가 그의 ‘다선일여(茶禪一如)’사상을 생활화하기 위해 꾸민 다원(茶苑) 이다.
초의선사는 일찍이 이곳에 기거하시며 「동다송」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다서를 저술하고 차를 재배하여 널리 펴는 등 당시 대흥사 주변의 유명한 다인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과 교우하며 다도의 이론과 실제의 양 면을 크게 정리하고 닦음으로서, 신라 때 부터 유행하여 오랜 전통을 이어오던 우리나라의 다도는 조선 후기 대흥사의 초의선사에 이르러 다시 꽃피기 시작하여 한국다도의 중흥조로 추앙 받는다.
소치(小痴) 허련이 그의 스승으로 모셨던 선사의 모습을 몽연록(夢緣錄)에서
<“스님이 머무는 곳은 두륜산 꼭대기 아래이다. 소나무 숲이 깊고 대나무(紫竹) 무성한 곳에 몇 칸의 초실을 엮었다. 늘어선 버들이 처마에 닿아 있고 풀꽃이 섬돌에 가득 차서 그늘이  뒤엉켜 있었다. 뜨락 가운데는 상하의 못을 파고(蓮池) 처마 아래에는 크고 작은 물통을 놓아 두었는데 대쪽을 연결해서 멀리서 구름비친  샘물(乳泉)을 끌어온다”> 라고 하였다.

* 초의 선사는 조선 후기의 승려이다.
서산대사의 법맥을 이은 대흥사의 13대 종사의 한사람으로 불교 중흥에 이바지 하였다
초의草衣禪師선사는 1786~1866(정조 10) 4월5일 전남 무안군 삼향면 출신으로 속성은 장씨이고 법명은 의순(意恂)이며 호는 초의(草衣)이다. 15세 때 나주 운흥사(雲興寺) 벽봉민성(碧峰敏性)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고 대흥사大興寺 완호(琓虎)스님께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草衣라는 法名을 받아 법맥을 이었다.  19세 때부터 대흥사를 떠나지 않고, 서산대사의 법맥을 이은 13대 종사의 한사람으로 불교 중흥에 이바지 하였다.
24세(1809)때에는 강진 茶山다산초당에서 유배 생활 중이던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과 사제지간의 인연을 맺어  3년 동안유학(儒學)을 배웠으며, 39세에1824년(순조24)에 一枝庵(일지암)을 띠 집으로 중건하고  1866년(고종3) 81세로 입적할 때까지 40여년간 이곳에서 독처지관(獨處止觀)하시면서 사상과 철학을 집대성하고 차(茶) 문화를 폈던 자리이며, 동다송(東茶頌)과 다신전(茶神傳), 초의선과(草衣禪課)와 선문사변만어(禪文四辯漫語)를 저술 하였다.
초의선사는일지암 중건시 이미 시승(詩僧)으로서 상당한 경지에 다다랐는데 특히 다선일미(茶禪一味) 사상에 심취하여 「東茶頌」<동다송>,「茶神傳<다신전>을 초록하고 차를 통한 선다 일여의 가풍을 드날리며 시(詩),서(書),화(畵-佛畵),차(茶道) 4절로서 이름이 높으 다성(茶聖)이다. 특히 선과 교, 유교와 도교 등 제반 학문에 조예가 깊고 범서에도 능통하고 범패에도 뛰어 났다.
또 많은 茶人, 학자들과 교류했는데, 동갑내기 친구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와우정을 나누고,, 金命喜 형제, 茶山다산 정약용과子 丁有山정유산, 洪顯周홍현주(정조의 사위), 병조판서 권돈인, 조선최고의 3절 위당 신관호 등. 석학, 예인들과 교류하며 쇠퇴해 가는 차 문화의 중흥을 도모해 조선후기 불교계에 새로운 禪風을 일으키고 명맥만 유지해오던 韓國茶道를 中興중흥시켜 일지암은 한국 차의 성지로도 각광받고 있다. 또 소치 허련(小癡 許鍊, 1808~1893)을 제자로 맞아 시.서.화(詩.書.畵)를 가르쳐 남종화(南宗畵)의 대가가 되게 하였다. 일지암은 한국 차 문화 중흥의 상징이 된 곳으로 한국다인회에 의하여 1979년에 중건되었다.

* 초의선사와 해남 대흥사
해남 대흥사에는 복원된 일지암, 초의기념관, 초의선사 동상, 초의선사의 부도와 부도비 등의 유적이 있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는 해마다 초의선사의 입적일을 맞아 그의 차 정신을 기리기 위해 초의문화제를 열고 초의문화상을 수여하고 있다.
음력 8월 2일에 열리는 초의문화제는 1992년에 시작되었는데, 전국의 차인들이 함께 모여 초의선사 헌다 례를 거행하는 등 다양한 문화 행사를 개최하였는데 대중화를 위해 초의 문화제는 10월 행사로 다양하게 열린다.
현재의 일지암은 1980 조자룡 선생의설계로, 여수 백년고가를 뜯어와 지었으며 초의선사는 고려이후 맥이 끊겼던 우리 차를 연구하시면서 차와 선이 둘이 아니다 는 다선일미 사상을 제창하여 해거도인 홍현주의 부탁을 받고 그 유명한 「동다송」과 「다신전의 저서를 남기셨다.

* 다선일미사상
초의에 있어서 차와 선은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다. 차를 마시되 [법희선열식(法喜禪悅食)]해야한다고 강조한다. 한잔의 차를 통해 법희선열을 맛본다고 한 것은 바로 초의의 다선일미사상을 엿보게 하는 것이다. 선사인 초의의 생애는 오로지 좌선하는 일에만 머물로 있지 않고 일상생활에서 멋을 찾고 불법을 구하려고 노력하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언제나 [제법불이(諸法不二)]를 강조 했으니 그에게는 선과 차가 별개의 둘이 아니고 시와 서가 둘이 아니며 시와 선이 둘이 아니었다.
초의는 '우리 차의 품질에 대하여 차의 색과 향기가 함께 뛰어나다'고 평하며 '동다기에 어떤 사람은 동다의 효가 월산 다에 미치지 못한다고 했지만 내가 보건대 색, 향기, 미가 조금도 차이가 없다. 또 다서에는 육안지방의 차는 맛으로, 몽산의 차는 그 약효로 뛰어났다고 하나 동다는 이 두 가지를 겸하고 있다.'라고 했다.

* 초의 선사의 동다송과 다신전
초의 선사는 그의 나이 43세가 되던 해인 1828년에 지리산 칠불암(七佛庵)으로 수행을 떠난 초의선사는 지리산 칠불암에서 다신전(茶神傳)을 초록(抄錄)해 낸다.
다신전은 청나라 모환문(毛煥文)의 만보전서(萬寶全書) 가운데 다경채요(茶經採要)의 내용을 추린 것으로 찻잎 따기, 물 끓이기, 차 만들기, 차 보관하기와 다구들에 이르기까지 제다에서부터 차 생활에 이르는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가 다신전을 초록한 이유는, 옛날부터 내려온 승가의 차 풍습을 이어가고 차의 도(道)에 대해 알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2년 뒤에 초의 선사는 일지암에 머물면서 칠불암에서 초록했던 다신전을 정서해 책으로 펴냈다.
초의는 또 1837년에 우리나라의 차를 기리는 노래인 동다송(東茶頌)을 지었는데, 진도부사 변지화(卞持華)가 해거도인(海居道人) 홍현주(洪顯周, 1793~1865)의 부탁으로 초의에게 다도를 물어본 데 대한 대답의 형식으로 짓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은 초의가 홍현주에게 보낸 편지에 잘 드러나 있다. 근자에 북산도인(北山道人, 변지화의 호)이 와서 당신께서 다도를 묻고자 한다기에 옛 사람들이 전해 오는 바에 의해서 동다송 한 편을 지어 보냈는데, 제 나름대로 규명하지 못한 대목은 본문을 그대로 옮겨서 묻는 말씀에 가름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내용이 산만하여 읽으시느라 괴로움이 많을 것입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글 속에 한 구절이라도 소용에 닿는 것이 있다면 금비지로(金鎞之勞)를 아깝게 여기지 마소서.
초의 선사는 동다송을 통해, 중국차의 제다법(製茶法)이나 포다법(泡茶法) 대신 덖고 건조시키는 우리만의 조다법(造茶法)을 이용해 만든 차의 색 향미가 더 뛰어남을 노래했다. 또한 중국의 다서(茶書)를 비교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 고사를 인용하고 상세하게 주석을 달아놓아 한국의 다경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현존하는 동다송의 판본은 몇 개로 나뉘는데, 디아모레뮤지움의 차문화전시실에 소장된 필사본인 ‘경암본(鏡菴本)’ , 석오(石梧) 윤치영(尹致英)의 필사본인 ‘석오본(石梧本)’, 송광사 보정스님이 필사한 ‘다송자본(茶松子本)’ 등이 그것이다.
초의가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과 차를 마시고 학문을 논하며 교류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제다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박학다식했던 그의 학문적 깊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범패(梵唄), 원예, 서예뿐만 아니라 장 담그는 법, 화초 기르는 법, 단방약(單方藥) 만드는 법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일까지 능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만년에도 꾸준히 일지암에 머물며 수행에 전념하던 초의는 1866년 세수 81세 법랍(法臘) 65세로 입적했다. 초의 선사가 남긴 저서로는 ‘일지암시고(一支暗詩藁)’, ‘일지암문집(一枝庵文集)’, ‘초의집(草衣集)’, ‘선문사변만어(禪門四邊漫語)’, ‘초의선과(草衣禪課)’, ‘동다송’, ‘다신전’ 등이 있다.

* 문화 유적지 : 대흥사 일지암, 성보박물관
참고문헌
대둔사지, 대흥사 역사와 문화, 동사열전, 해남역사 문화자원(사)전통경관보전연구회), 해남(한반도의 땅끝을 찾아서),
해남군 문화공보실,1996. 해남군의문화유산,  땅끝해남, 해남 정윤섭, 향지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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