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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두일 - 해남 유일한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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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두일 - 해남 유일한 의병장

  • 위치 :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이진리 1227 외
  • 문의
    문화관광과 문예관광팀 : 061-530-5229 / 관광안내:061-532-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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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북평 이진출신인 황두일은 해남전역에서 의병활동이 활발히 전개됐던 1909년 2월 이덕삼 항일의병부대로 들어가 중군으로 활동하다 이후 독립부대를 편성해 해남일대에서 활약을 한다.
1909년 항일의병활동을 기록한 항전 책자에는 황두일의 부대가 120여명에 이른 것으로 적고 있다. 황두일의 의병활동은 북평면 각 마을에 영향을 미쳐 이진마을과 동해, 용일마을, 그리고 삼산면 출신 인사들이 그의 부대로 와 함께 의병활동을 전개한다. 황두일 부대의 활동무대는 해남일대와 완도, 멀리는 우수영까지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해남을 비롯한 남해안 일대의 의병부대들은 각기 부대별로 활동을 했었는데 그 의병부대를 이끈 의병장 중 황두일 만이 유일한 해남출신이었다.
1909년 7월 각 부대별로 활동하던 의병들은 완도에서 활동하던 황준성을 대장으로 추대해 연합부대를 형성한다. 이때는 이미 의병들의 활동무대가 두륜산 일대로 국한된 데다가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 의해 그 규모도 상당히 축소가 된 상태였다. 연합부대를 형성한 의병들은 북평 성도암에서 왜적과 맞서 싸우다가 미황사로 밀려 그곳에서 하루를 지낸 후 8일 대흥사 심적암으로 장소를 옮긴다. 조선말 마지막 의병투쟁 장소로 기록된 대흥사 심적암 전투에 황두일도 동행하는데 아쉽게도 이들 의병들은 다음날 새벽 4시 일본군의 기습으로 전멸하고 만다. 황두일은 부하들과 함께 이 곳을 빠져나와 다시 부대를 수습해 간헐적인 전투를 전개하지만 동년 8월 30일 일진회의 공작에 말려들어 부하 79명과 함께 체포돼 교수형을 당하고 만다.
황두일의병장은 1884년 북평 이진마을에서 태어났다. 5남3녀 중 2남으로 태어난 황두일은 기골이 장대해 어렸을 때부터 역사로 추앙을 받았다고 한다.

* 유적: 이진진성사진 및 비
* 찾아오시는 길 : 해남읍~ 완도방면~ 북평면 남창~ 땅끝방면 도로~ 북평면 이진
참고문헌
해남의 시문학사, 한국문학을 빛낸 해남의 시인들, 해남한반도의 땅끝을 찾아서(해남군 문화공보실), 해남군의문화유적길라잡이(김승기), 해남 정윤섭 향지사1997. 해남의문화유산 , 해남역사 문화자원 (사)전통경관보전연구회, 해남우리신문), 땅끝해남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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