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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말 비운의 민족주의자 - 김홍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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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말 비운의 민족주의자 - 김홍배

  • 위치 :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이진리 1227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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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관광과 문예관광팀 : 061-530-5918 / 관광안내:061-532-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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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1932년 호남최대 반일조직이 북평면 이진에서 결성된다.
해남과 완도, 나주, 목포 등 10개 군에 걸쳐 조직된 전남운동협의회는 이진 출신인 김홍배에 의해 결성됐고 1934년 발각됐을 때 조선일보는 호외까지 발간하며 이 사건을 자세히 다룬다. 지주의 아들이었던 김홍배는 일본 메이지대학까지 다닌 인텔리로 고향인 이진마을에 와 야학운동을 펼치며 독립운동을 전파한다. 이 사건으로 그는 2년6개월을 복역한다. 그러나 해방 후 좌우익의 갈등으로 처형된다.

김홍배 - 항일조직 전남협 결성
조선일보, 동아일보를 비롯해 당시 중앙일간지를 몇 달에 걸쳐 장식할 만큼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인 전남운동협의회 조직사건, 이 조직을 결성한 이가 바로 북평 이진 출신인 김홍배였다.
전남운동협의회는 농민들을 대상으로 한 조직으로 농민들의 생존권 문제와 항일 운동적 성격을 띤 조직이었다. 9개 군에 걸쳐 조직되었던 전남운동협의회는 1930년대 전남 최대 항일조직이었고 해남에는 북평면과 산이면, 현산면에 각각 지부를 두고 있었다.
김홍배는 1909년 북평 이진의 김행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200석의 소작을 줄 정도로 넉넉한 집안에서 자란 김홍배는 경성경신학교를 졸업하고 1930년 일본 와세다 대학 전문부 법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그는 일본에서 전국노동조합협의회에 가입해 반제운동을 벌이다 퇴학을 당하고 고향 이진으로 돌아오게 된다.
1930년대는 사회주의 사상이 지식인들과 학생들 사이게 전염병처럼 번지던 때 김홍배도 고향에 돌아와 사회주의 성격을 띤 전남운동협의회를 구성한다. 1930년대는 일본의 탄압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기에 국내의 반일운동은 사회주의 계열이 주도했고 민족주의자들 대부분은 개량주의적 입장으로 돌아설 때가 이때였다.
전남운동협의회가 주도한 소작료 인하투쟁과 항일운동에 농민들은 높은 지지를 보냈지만 이 조직은 1934년 발각되고 만다. 이 사건으로 김홍배는 3년 형을 받아 목포형무소에 수감되고 출옥 후에도 미전향 사상범으로 분류돼 청주 예방구금소에 구금돼 있다가 해방을 맞는다. 김홍배는 해방 후 조선공산당 전남도당에 몸에 담았다가 미군정에 의해 체포돼 광주형무소에 수감돼 있다가 6.25 발발 직후 후퇴하던 군인들에게 의해 처형되고 만다.  

* 유적: 해남군 북평면이진마을 및 항일마을비 사진
* 찾아오시는 길 : 해남읍~완도방면~북평면 남창~땅끝방면 도로~북평면 이진
참고문헌
해남역사문화자원 발굴조사(2012),해남(한반도의 땅끝을 찾아서), 해남군 문화공보실, 1996. 해남(문화유적), 정윤섭, 향지사, 1997. 항일운동유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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