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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전투의 혁명시인 -  김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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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전투의 혁명시인 - 김남주

  • 위치 :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봉학길 98
  • 문의
    문화관광과 문예관광팀 : 061-530-5919 / 관광안내:061-532-1330/ 061-530-5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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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사랑과 전투의 혁명시인 김남주는 두륜산이 지척에 바라보이는 전남 해남군 삼산면 봉학리 535번지에서 1945년 음력 10월 16일 농사꾼 아버지 김봉수씨와 어머니 문일님씨 사이의 3남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향리에서 삼화국교와 해남중학교를 거쳐 64년 당시 명문고로 손꼽히던 광주제일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입시위주의 획일적인 학교교육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퇴한다.
  김남주는 69년 검정고시를 거쳐 전남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한 후, 3선개한 반대투쟁, 교련반대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반독재 투쟁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그가 우리 사회의 현실에 본격적인 문제 의식을 갖고 체계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당시 그가 관심을 가지고 읽었던 책은 『창작과 비평』,『네루다 서정시집』등이었고, 사회과학에 대한 독서를 통해 세계역사와 우리 사회에 대한 사회과학적 인식에 새로운 눈을 뜨게 된다.
 이 시기에 김남주에게 특히 영향을 주었던 시들은 영문으로 읽었던 푸시킨, 레르몬토프, 네크라소프 같은 러시아 시인들의 저항시들과 파블로 네루다의 시였다.
 그러다가 72년 10월 유신체제를 위한 계엄령이 선포되고 유신 헌법이 확립되자, 이듬해 김남주는 친구 이강과 함께 박정희 독재와 유신체제를 거부해야 한다는 유인물을 만들어 살포한, 세칭 「함성」지 사건으로 연루 구속되어 8 개월 간의 옥고를 치르고, 이 사건으로 그는 전남대에서 제적당한다.
 출옥 후 74년에 그는 고향 해남에 내려가 농사를 지으면서 농촌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김남주가 시인으로 데뷔한 것도 이때였다. 『창작과 비평』여름호에  감옥체험과 농촌현실을 노래한 시 「진혼가」,「잿더미」등 7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시으로 등단하였다.
 그리고 76년에는 『장길산』을 지필하기 위해 해남에 내려와 있던 소설가 황석영과 교우하면서 77년「해남농민회」를 결성하였고, 광주로 나와 「민중문화연구소」를 개설하는 등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78년 가장 강력한 반유신투쟁 지하조직 '남민전'의 '전사'로 활동하다가 이듬해 10월 4일, 80명의 동지와 함께 체포․구속된 김남주 시인은 이 사건으로 징역 15년형이 확정되어 광주교도소 등지에서 복역했다. 그는 옥중에서 교도관 몰래 수많은 옥중시를 써서 극비리에 유출했는데, 그 시들은 80년대 우리사회 변혁운동에 일대 도화선이 됐다. 남민전 사건으로 구속 된 이후 창작된 김남주의  옥중시가  80년대 한국시의 지평을 확대하고 한 차원 끌어 올린 작품으로 평가 받았다. 칫솔을 날카롭게 갈아서 우유곽 안쪽에다 꼭꼭 눌러 쓴 그의 시편들은 운동권 사이에 감동적으로 회자되었다.
그가 감옥에서 쓴 시들은 당시 대학생들의 의식화 교재가 되었고, 노래패는 그의 시를 노래로 만들어냈다. 암울했던 시대, 그의 시만큼 강한 무기는 없었다. 그의 시는 가장 선동적인 격문이었고 가장 투쟁적인 노래였다. 안치환이 부른 ‘노래’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자유’등은 이 때 씌어진 시들이다.
 김남주는 88년 12월 21일 9년 3개월의 옥고 끝에 석방되기까지 그의 청춘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냈으며, 300여편의 옥중시로 80년대 한국 민족문학의 대표적인 시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석방 이후 옥중투쟁에서 얻은 지병(췌장암)으로 투병하다가 94년 2월 13일, 불과 마흔 아홉의 나이로 부인 박광숙 여사와 아들 토일 군을 남겨 둔 채  생을 마감했다.
그가 남긴 470여편의 시 가운데 300여 편이 옥중에서 쓴 시이며, 그의 옥중시는 80년대 한국시의 한 절정을 이루었다. 시집으로는 『진혼가』, 『나의 칼 나의 피 』,『 조국은 하나다』, 『솔직히 말하자』,『사상의 거처』,『이 좋은 세상에』『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등과 시선집『사랑의 무기』, 『저 창살에 햇살이1.2』,『꽃 속에 피가 흐른다』등 여러 권이 있으며, 제3회 윤상원문화상 수상, 제9회 신동엽창작기금, 제6회 단재상 문학부문 수상. 영랑시문학상 등을 수상 했다.

□ 김남주 대표작
자유
만인을 위해 내가 노력할 때
나는 자유이다
땀 흘려 힘껏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이다
피 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몸부림칠 때 나는 자유이다
피와 땀과 눈물을 나눠 흘리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사람들은 맨날
밖으로는 자유여, 형제여, 동포여! 외쳐대면서도
안으로는 제 잇속만 차리고들 있으니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도데체 무엇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제 자신을 속이고서

* 나의 칼 나의 피
만인의 머리 위에서 빛나는 별과도 같은 것
만인의 입으로 들어오는 공기와도 같은 것
누구의 것도 아니면서
만인의 만인의 만인의 가슴 위에 내리는
눈과도 햇살과도 같은 것 .....

사랑은
겨울을 이기고 사랑은
봄을 기다릴 줄 안다
기다려 다시 사랑은
불모의 땅을 파헤쳐
제 뼈를 갈아 재로 뿌리고
천년을 두고 오늘
봄의 언덕에
한 그루 나무를 심을 줄 안다

사랑은
가을을 끝낸 들녘에 서서
사과 하나 둘로 쪼개
나눠 가질 줄 안다
너와 나와 우리가
한 별을 우러러 보며.

*유적: 해남군 삼산면 봉학길 98 (봉학리 535)
참고문헌
*참고문헌: 해남의 시문학사, 한국문학을 빛낸 해남의 시인들, 해남한반도의 땅끝을 찾아서(해남군 문화공보실), 해남군의문화유적길라잡이(김승기), 정윤섭 향지사 1997. 해남의문화유산 ,땅끝해남 2003, 해남역사 문화자원(사)전통경관보전연구회,해남우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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