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 메뉴 바로가기 사이트이용안내 바로가기



여성해방운동을 노래하다 - 페미니스트 고정희
사진크게보기

여성해방운동을 노래하다 - 페미니스트 고정희

  • 위치 :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송정길 45 9
  • 문의
    문화관광과 문예관광팀 : 061-530-5919 / 관광안내:061-532-1330 / 061-530-5915
찾아오시는 길
빠른길찾기
소개
여성의 해방을 노래한 페미니스트 고정희는 1948년 1월 17일, 전남 해남군 삼산면 송정리에서 아버지 고양동씨와 어머니 김은녀씨 사이의 5남 3녀 중 장녀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성애(聖愛)이다.
어머니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으며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 다녔다. 전형적인 농촌의 대가족 속에서 자란 그녀는 삼산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거의 독립적으로 성장하였으며 정규교육과정을 거치지 않고 독학으로 공부했다. 형제들이 많아 제대로 학교에 갈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녀시절부터 그의 문학에 대한 열정은 남달랐다.
고정희 시인이 14살 때 시집와서 시인이 자신을 어머니처럼 따랐다는 큰 올케의 회상에 따르면, 그녀는 거의 밤을 세워가며 책을 읽기도 하고 불을 아궁이에 지피다가 불이 꺼지는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책만 읽다가 어머니에게 꾸중을 들은 적도 있다고 한다.
고정희는 고향을 떠나기 전까지 해남에서 〈해남문학동호회〉와 「월간해남」(1968∼1969) 기자로 활동하며 홀로 문학 수업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1967년에는 《새농민》지에 장만영 시인의 추천으로 시가 실리기고 했으며, 이듬해 해남의 「현」다실에서 시화전을 갖기도 했다. 이즈음 그는 목포지역의 젊은 문인들로 이루어진 <흑조> 동인으로 활동하며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70년부터 《새전남》,《주간전남》,월간《백조》, 《소녀생활》등에서 기자 생활을 거쳐  1974년부터 광주 YWCA 대학생부 간사로 일했으며, 1975년 박남수 시인에 의해『현대시학』에 「부활 그 이후」,「연가」 등이  추천 완료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그리고 1979년 서른한 살의 만학으로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한 후, 허형만, 김준태, 장효문, 송수권, 국효문 등과 함께 《목요시》 창간동인으로 활동한다. 그 후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여성문학인위원회 위원장과 시창작 분과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1984년부터는 기독교 신문사, 크리스챤 아카데미 출판간사로 활동하였으며, 1986년부터 가정법률상담소 출판부장으로 일하면서 여성문제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고정희가 여성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1984년 대안문화 운동단체인 《또 하나의 문화》 창립 동인으로 참가하게 되면서부터이다. 《또 하나의 문화》는 기존의 문화를 남성중심주의 문화로 규정하고 남녀가 평등하고 건강한 벗으로 협력할 수 있는 사회를 지향하며 대안적 문화운동을 표방한 단체이다.
사회학․인류학․여성학 등을 전공한 동인들과 더불어 새로운 대안문화를 만들어 나간다는 데 의기투합한 고정희는 여성 문화 무크지 『또하 나의 문화』를 창간하는 데 개국공신의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개인적으로는 그 동안 모아둔 여성문제 자료를 바탕으로 '여성사 새로 쓰기' 작업을 구체화하는 것도 이 만남을 통해서 결실을 거둔 것들이다.
1988년에는 여성문제를 대중매체를 통해 공론화하는 데 이바지한 여성 정론지 《여성신문》의 주간을 맡아 신문 창간의 산파 역할을 해냈다.
그는 이때 여성 억압의 다양한 현장들과 부딪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그는 날마다 시를 쓸 짬이 안 난다며 투덜대면서도 새벽 다섯 시만 되면 어김없이 책상 앞에 앉아 시를 썼다고 한다. “오늘 하루를 생애 최초의 날처럼, 또한 마지막 날같이”를 생활 지침으로 삼고 그는 가열차게 살았다.
1990년 필리핀 마닐라의 아시아 종교음악 연구소 초청으로 아시아 시인 및 작곡가들이 모여 1년 동안 벌인 ‘탈식민지 시와 음악 워크숍’에 참여하여, 체류 중 ‘밥과 자본주의’. ‘외경읽기’ 등 연작시를 창작한다. 1991년 귀국하여 한국가정법률상담소에서 『가족법 개정 운동사』를 편집 제작하였으며, 그 해 6월 8일 [또 하나의 문화] 월례논단에서 "여성주의 리얼리즘과 문체혁명"이란 주제로 발표를 마치자마자 그의 시의 모태가 되어 온 지리산으로 간다.
그러나 느닷없이 쏟아진 폭우에 뱀사골에서 실족, 43세를 일기로 불타던 삶을 마감하였다.

그는 첫 시집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1979, 평민사)를 간행한 이후 생을 마감할 때까지 , 『실락원 기행』(1981, 인문당), 장시집『초혼제』(1983, 창작과 비평사), 『이 시대의 아벨』(1983, 문학과 지성사), 『눈물꽃』(1986, 실천문화사), 『지리산의 봄』(1987, 문학과 지성사), 장시집『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1989, 창작과 비평사), 『광주의 눈물비』(1990, 도서출판 동아), 『여성해방 출사표』(1990, 동광출판사), 『아름다운 사람하나』(1991, 들꽃세상) 등 10권의 시집을 남겼으며,  유고시집으로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1992, 창작과 비평사)와 한국대표시인 100인선집 중 90번째 시선(詩選)인 『뱀사골에서 쓴 편지』(미래사, 1991)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남도의 가락을 접목시킨 『초혼제』로 83년 대한민국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고정희 시인은 43세의 아까운 나이로 요절했지만 짧은 생애 동안 11권의 시집을 남겼다. 그의 대부분의 시가 80년대 씌여진 것들이니 이 시기 그의 삶은 전적으로 시작(詩作)에 바쳐졌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기독교 관계 일과 여성운동, 그리고 작가로서의 다양한 형태의 현실참여를 통해 시인으로서, 문화 및 사회운동가로서 남다른 활동을 열성적으로 전개하였다.
그가‘불의 시대’라고 일컫는 저 80년대를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지 가히 짐작할 만하다.
그는 자신과 주변사람, 사회와 세상과의 관계를 선명히 파악한 사람으로서 인생을 일관성 있게, 그리고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고, 우리가 소망하고 또 이루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실천한 사람 중 하나이며 시와 삶이 거의 일치한 보기 드문 시인이었다.
고정희는 우리시사 속에서 여성문제를 최초로 폭넓게 탐구한 여성주의 시인으로, 그리고 거대한 스케일과 왕성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현실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역사에 대한 준열한 증언을 했던 민중시인으로, 또 기독교 정신과 생명에 대한 도덕적 순수함으로 처연한 서정성을 보여준 서정시인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 고정희 대표작
* 상한 영혼을 위하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라.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 듯
영원한 바람은 불 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 잡은 손 하나 오고 있거니.....

* 생가유적: 해남군 삼산면 )송정길 45-9(송정리 259)

*참고문헌: 해남의 시문학사, 한국문학을 빛낸 해남의 시인들, 해남한반도의 땅끝을 찾아서(해남군 문화공보실), 땅끝해남 2003, 해남역사 문화자원(사)전통경관보전연구회,)등.
사진갤러리
  • 11면-고정희3.JPG
  • 19-고정희붓글씨.JPG
  • 6-2고정희시인.jpg
  • 고정희생가간판.jpg
  • 이미지 없음

이전

다음

목록보기
만족도 조사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만족하십니까?
해남군 QR코드
담당자
  • 문예관광팀 최영훈 ☎ 061-530-5292-530
갱신일자
2018-04-22
공공누리 마크(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