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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영권 관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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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영권 관광지

  • 위치 : 해남군 문내면 관광레져로 12
  • 문의
    땅끝관광지관리사업소 우수영담당: 061-530-5541 / 관광안내:061-530-5915 / 061-532-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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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우수영 관광지 -불멸의 이순신과 명량대첩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에 위치해 있는 우수영관광지는 임진왜란 7년 전쟁을 종식시킨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곳으로 당시 최후의 교두보였던 울돌목을 성지화하기 위해 세운 기념공원으로서 의의를 가지고 있다.

1597년  충무공이 이룩한 명랑대첩을 기념하고 옛 성지의 모습을 간직한 곳으로 1986년 국민관광지로 지정,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복원하려는 뜻에서 1986년 국민관광지로 지정했고 1991년 명량대첩 기념공원으로 조성해  명량대첩의 역사적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울돌목이 바라다 보이는 위치에 거북배등 다양한 체험공간을 활용해 10월에는 전남도 축제로 명량대첩축제와 주말에는 명량역사체험마당등 다양한 볼거리와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공원 내  또 공원 곳곳에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과 관군들의 전투모습을 조각한상들이 배치되어 생생한 감동을  공원내 전망대에 서면 명량해협과 진도대교를 비롯하여 명량대첩탑, 명량대첩비 탁본, 어록비, 충무공유물전시관 등의 시설물들이 보인다.
총무공 유물전시관에는 명랑해전에서 사용했던 천자총통, 지자총통 등이 전시되어있고 그대의 활약상을 담은 영상도 상영한다. 또 거북선 실제모형, 거북선 절개모형, 판옥선 모형, 여러 가지 무기, 및, 명량해전에서 사용했던 천자총통, 지자총통이 전시돼 있고  공원내에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과 관군의 전투 모습을 조각한 상들이 배치되어 생생한 감동을 주고 있다.
그리고 강강술래 세계무형문화재 배경과 객사. 토성. 전적지 등 과 주변에는 충무사. 울독목. 진도대교 등의 관광지가 있다.

* 명량대첩탑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명량대첩기념공원내에 있는 명량대첩 탑은 지난 1990년 기념공원 조성과 함께 세워진 탑이다. 이 기념탑은 1597년 9월16일충무공 이순신장군이 휘하의 장병들과 지역 의병들이 울돌목의 지형과 조류를 이용하여 13척의 병선으로 왜선 133여척을 격파한 세계 해전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대 승첩(勝捷)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탑으로 의의를 가지고 있다.
*탑의 조형은 조국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영령들을 기리는 높이17m, 넓이19.12m의 화강암으로 된 명량대첩 탑이 우뚝 솟아 충무공을 중심으로 굳게 뭉쳐 싸우는 관병과 의병들의 모습을 군상 조각으로 배치했다.

*명량대첩의의비
임진왜란 7년 전쟁을 종식시킨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곳으로 당시 최후의 교두보였던 울돌목을 성지화하기 위하여 세운 기념공원의 건립 의의를 기록한 비이다.

*충무공어록비
"병법에 이르기를 전쟁에 임하여 반드시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살고 살길만을 찾고자 하면 죽는다"의 (필사즉생,필생즉사)와 한명의 군사로도 길목을 지킨다면 천명의 적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일부당경,족구천부)의 어록 글이다.

*회령포결의상
명량을 최후의 결전장으로 삼고 장흥 회령포에 당도한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과 전라우수사 김억추 등 5장군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하는 모습을 재현한 것이다.

*폐선수리상
칠천량 패전이후 우리에게 남은 전선은 부서진 판옥선 12척 뿐이었습니다. 이 때 밤낮으로 폐선을 수리하여 명량해전을 가능케 해준 정충량,김세호 등 무명의 선장과 목수들의 공을 기린 상입니다. 그래서 우수영에 페선1척이 수리해 보태어져13척이 됐다고 한다.

*마씨오부자상
부친 마하수(馬河秀)부친이 적선에 포위된 통제사를 구원하다가 적탄에 맞아 전사하자 복수를 맹세하고 적이 패퇴할 대까지 결사의 항쟁을 한 부자의 공을 기린 상이다.

*울돌목 쇠사슬
울돌목 해안 양쪽에 쇠사슬을 매어놓고 일본전선을 유인하여 쇠사슬을 잡아당기면 일본전선이 쇠사슬에 걸려 뒤집히게 했다는 설화에 따라 복원하여 만든 것이다.  

*오극신 부자 참전상
해남출신 오극신 계적 부자가 의병으로 참전하여 싸우다가 큰 공을 세우고 전사한 것을 기리기 위한 상이다.

*양씨숙질 조씨부자 참전상
조응량 부자와 양응지 숙질이 의병으로 참전하여 명량해전에서 적을 무찌르다 승리를 눈앞에 두고 전사하여 공을 기린 상이다.  

*충무공어록비
충무공어록비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충무공의 서한문 일절을 의재 허백련 선생이 쓰신 글로서 그 뜻은 “만약호남이 아니었더라면 어찌 나라와 겨레를 보존 하였으리오” 라는 내용입니다. (1593년에 난중일기기록의, 사헌부지평 현덕승의 서한문 )명량대첩의 승리는 해상 의병의  눈부신 활약, 울돌목의 거센 물살, 이순신의 지혜가 삼위일체가 돼 이룬 승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남사람들을 비롯한 호남사람들의 애국정신을 느낄 수 있는 비이다.

*울돌목
울돌목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조선수군이 13척의 병선으로 조류를 이용해 왜선 133척을 격퇴시킴으로써 임진왜란 7년 전쟁을 종식시킨 결정적인 계기를 이룩한 곳으로 조선을 구한 명량대첩 전첩지이다.
눈 앞에서 소용돌이치는 울돌목이 인상적이다.

바다가 운다고 해 명량이라 이름되기도 하는 울돌목은 해남군 문내면 우수영과 진도군 녹진사이를 잇는 가장 협소한 해협으로 넓이가 325m, 가장 깊은 곳의 수심이 20m, 유속이 11.5노트에 달해 굴곡이 심한 암초사이를 소용돌이 치는 급류가 흐른다.
이러한 빠른 물길이 암초에 부딪쳐 튕겨져 나오는 바다소리가 20리 밖까지도 들린다고 한다. 이러한 지형의 특징이 정유재란 당시 3백여척의 왜선들에게 손쓸 방도도 없이 참패를 안겨준 큰 요인이 됐던 것이다. 울음을 터트리는 울돌목 바다위로 지금은 아취형 진도대교가 허공을 가른다.

*울돌목의 유속(물살)
울돌목의 유속은 왜 빠를까요??
국립해양조사원 분석 자료에 의하면 밀물 때 넓은 남해의 바닷물이 좁은 울돌목으로 한꺼번에 밀려와서 서해로 빠져나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때 해안의 양쪽바닷가와 급경사를 이뤄 물이 쏟아지듯이 빠른 급류를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특이한 지형조건의 울돌목은 병법적으로 보면 사지(死地)라고 한다. 이순신장군은 이런 울돌목의 사지를 등 뒤에 두고 싸우는 것은 너무 불리하다고 판단해 1597년 9월16일 명량대첩이 있기 하루 전인 15일에 진을 벽파진에서 전라우수영으로 옮긴다. 이러한 지형을 이용해 사지를 적의 등 뒤에 위치할 수 있도록 해서  솔선수범 하는 자세로 조선수군과 이순신장군은 조선수군의 제해권을 확보하는신화를 창조 한다.
울돌목의 소용돌이 치는 급류를 보려면 바닷물이 들고 나는시간(물때)을 알아야 한다. 물때가 매일 조금씩 다르지만 보통 오후 2시 ~ 4시 사이에 소용돌이 치는 울돌목의 급류를 볼 수 있다.

*전라우수영은?
해남에서 부안까지의 서해안을 경비했던 전라우수영은 진도를 바라볼 수 있는 명량 해협과 해남의 남단 화원 반도에 접해 있고, 울돌목이 앞으로 펼쳐져 있다.
우수영은 명량대첩전첩지로 우리나라 해전사에 빼놓을 수 없는 대 역사가 이루어진 곳이자 강강술래의 본고장이기도 하다. 이곳이 우수영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도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위치 때문이었다. 원래 이곳은 백제 때는 황술현의 한 지역이었으며 고려 때에는 영암에 속한 황원군의 땅이었다가 1448년(세종30) 해남현이 된 곳이다.

전라우수영은 조선시대(수군)해군 사령본부인 하나로 부산의 경상좌수영, 충무의 경상우수영, 여수의 전라좌수영, 해남의 전라우수영이 있다. 그밖에 충청도나 강화에도 수영이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이 없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왜구와 접촉이 극심한 전라도와 경상도에 한하여 수군절도사가 상주하는 주진을 각각 두 곳에 설치하였는데, 서울에서 보아 각도의 서편, 즉 우편을 전담하는 주진을 우수영, 동편 즉 좌편을 전담하는 주진을 좌수영이라 하였다.  
전라수영이 설치된 것은 1440년(세종22)의 일이었고, 1432년(세종14) 무안 대굴포에 있던 처치사영(處置使營)이 현재의 목포로 옮겨지고 목포에 있던 병선들이 지금의 우수영인 황원의 주량(周梁)으로 옮겨지면서 이곳에 목포만호를 두게 된다.
황원 주량의 전라수영이 우수영(전라우도수군절도사영)으로 승격된 것은 성종10년(1479)부터의 일로 전라도 서남해안이 너무 광범위하여 여수에 전라좌수영이 개설되면서 이곳은 전라우수영, 약칭 우수영이 된 것이다.
경상우수영은 처음에 거제에 두었다가 1604년(선조37) 충무로 옮겼으며 각 수영에는 한학의 역학(譯學)과 왜학의 역학을 각1인을 두었고. 1907년 군대 해산령에 의하면 각 도의 수영은 폐영되었으나, 지금까지도 수영이 남았던 곳은 그 명칭과 함께 흔적이 남아있어 우수영이라 부른다.

*강 강 술 래 (세계무형문화유산)
문내면 우수영 일대에서 전승되어 오고 있는 해남 강강술래놀이는 해남의 대표적인 민속놀이이자 전라남도 해안 일대와 섬 지방에 널리 분포 전승되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부녀자 놀이중 하나다.
이 놀이는 8월 한가위 세시풍속 놀이지만, 정월대보름에 행해지기도 한다.
한가위와 대보름날 달 밝은 밤에 마을의 처녀들과 아낙네들이 새 옷으로 단장하고 손과 손을 맞잡고 원무하기도 하고 또 여러 가지 놀이를 번갈아 가면서 밤이 지새도록 노는 모습은 전라도 특유의 풍류와 멋이 들어있다.
강강술래는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적에게 아군의 숫자가 많음을 위장하기 위해 원무를 행하게 한 것에서 유래 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 설은 전라남도 남해안 일대에 전해오고 있는 전설에 근거를 둔 것으로 이순신 장군이 해남의 옥매산(玉埋山), 진도의 만금산(滿金山), 목포의 유달산 노적봉(露績峯) 등을 마람으로 엮어서 군량미를 노적으로 보이게 하고 또 인근 부녀자들을 동원 남장으로 변장 병력이 많음을 위장하기 위해서 손과 손을 마주잡고 원무(圓舞)토록 한 것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고 있다.

강강술래 놀이는 여러 설이 있는데 고대 마한 때부터 비롯되었다는 설, 고대의 수확제의 오신행사 놀이에서 연원 되었다는 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창안했다는 설 등 여러 설이 있다.
해남강강술래는 문내면 ‘강강술래보존회’를 중심으로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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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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