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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후원가 - 참판 이재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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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후원가 - 참판 이재량

  • 위치 : 전란남도 해남군 황산면 우항길 124-1
  • 문의
    문화관광과 문예관광팀 : 061-530-5227 / 관광안내: 061-532-1330 / 061-530-5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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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고종임금 때 종 2품인 가선대부 참판을 지낸 이재량은 황산면 우항리 출신으로 만석꾼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관직을 떠나 고향으로 내려온 그는 우항리에 남강정자와 우항기숙을 지어 후학을 양성하고 이순신 등이 배향된 오충사 강당기를 지어 유림들 강학에 힘쓴다. 우리나라 마지막 의병운동이었던 대흥사 심적암 의병들에게 군량미를 지원하고 동학농민봉기 때도 거액의 자금을 지원한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왕조실록 태백산본 영인본을 고려대와 연세대에 기증한다. 그의 생가였던 가옥은 현재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이재량(李載亮 전주인 1857-1938)
이재량(호號 남강南崗)은 이참판으로 더 잘 알려진 인물로 우항마을에서 태어났다.
고종황제와 일가간인 이재량은 어려서부터 천성이 순박하고 효성이 지극했으며, 경사(經史)를 두루 통하고 특히 문장과 역사에 뛰어났다.

철종이 죽고 고종이 즉위하자 대원군은 그동안 안동김씨에 의해 삭탈관직 되었던 이들의   신원을 복권시켰고, 이재량은 대원군의 천거로 양호선무종사관에 제수되었고, 남평 현감과 동부승지(同副承旨), 통정대부(通政大夫) 등을 거쳐 마침내 광무 6년(1902) 가선대부 참판에 올라 3대가 추증되었다.
하지만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관직에서 물러난 이재량은 고향으로 돌아와 남강정과 우항가숙을 열어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는 충효의 근본을 바로 세우기 위해 이순신, 유행, 이억기, 이유길, 이계년 등 다섯 분의 충절을 기리는 오충사기를 지어 지역유림의 강학에 도움을 주었다.

일설에는 동학농민운동 당시 남리역의 대접주 김신영에게 거액의 공작금을 전달해 동학운동을 간접 지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일본침략기 일본이 우리의 역사 침탈을 우려 해 조선왕조실록 태백산본의 영인본을 고려대와 연세대에 기증하는 등 지역유지로서 선지자적인 모습을 보여준 이재량은 천수를 다하며 향년 8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는데, 당시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장례행렬이 무려 십 리에 달했다고 한다.

※ 우항리 공룡화석지가 위치한 마을에 현재, 정명식 가옥이라는 이름으로 생가가 보존돼 있음.
참고문헌
해남의 시문학사, 한국문학을 빛낸 해남의 시인들,  해남역사문화자원 발굴조사(2012),
해남(한반도의 땅끝을 찾아서), 해남군 문화공보실, 해남군, 1996. 황산면지, 해남(문화유적), 정윤섭, 향지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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