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 우수영 관광지 - 쇠사슬감기틀
우수영 관광지 쇠사슬 가기틀은 명랭대첩때 울돌목 해안 양쪽에 쇠사슬을 매어놓고 일본전선을 유인하여 쇠사슬을 잡아당기면 일본전선이 쇠사슬에 걸려 뒤집히게 했다는 설화에 따라 복원하여 만든 것이다.
*명량대첩
역사성을 전라우수영이 표면에 드러난 계기는 다름아닌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장군이 이룩한 명량대첩이다.
이순신장군이 옥에서 풀려나 권율 휘하에 있다가 백의종군하던 중 나라의 위태로움 때문에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을 받고 그날로 장흥 회령포에 이르러 간신히 13척의 범선을 수습하여 이곳 우수영에 당도했다. 이때 왜군들은 2백여척에 수 만 명의 군인을 싣고 울돌목을 통과하여 예성강으로 진출, 이미 직산에 머물러 있던 육군과 합세해 서울을 침범하려는 계획이었으나 일본군에 있어 울돌목 장악은 중요한 과제였다.
임진년 전라수사로 있을 때 부터 울돌목의 지형조건을 파악한 장군은 치밀하게 준비해 나갔다.
쇠사슬 두줄을 안목과 밖목에 건너 매 올렸다 내렸다 할 수 있도록 울돌목에 장치해 두고 장수들을 불렀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하였고 또 한사람이 길을 막으면 천사람을 두렵게 할 수 있다 하였으니 이것은 지금의 우리를 이름이라. 공들은 살 생각을 말고 조금도 명령을 어기지 말라' '나라를 위해 죽기로서 싸워라, 만일 조금이라도 영을 어기는 자는 군법을 시행하리라' 하여 임전결의를 다졌다.
1597년 9월 16일 새벽. 드디어 어란포에 머물고 있던 일본수군들이 밀물을 타고 명랑으로 공격해 왔다. 이순신이 13척의 배로 이를 공격하니 왜선이 이순신의 배를 포위하여 격전이 벌어졌으나 장군은 적장 마다시(구루시마미치후사)를 향해 시위를 당겼다. 이때 기다리고 기다렸던 조수가 썰물로 돌아서자 마다시와 기함을 잃은 왜군들은 혼비백산 도망가느라 바빴다.
이때 대파된 왜선은 1백 33척으로 세계해전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대승리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명량대첩이다.
우수영 관광지 쇠사슬 가기틀은 명랭대첩때 울돌목 해안 양쪽에 쇠사슬을 매어놓고 일본전선을 유인하여 쇠사슬을 잡아당기면 일본전선이 쇠사슬에 걸려 뒤집히게 했다는 설화에 따라 복원하여 만든 것이다.
*명량대첩
역사성을 전라우수영이 표면에 드러난 계기는 다름아닌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장군이 이룩한 명량대첩이다.
이순신장군이 옥에서 풀려나 권율 휘하에 있다가 백의종군하던 중 나라의 위태로움 때문에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을 받고 그날로 장흥 회령포에 이르러 간신히 13척의 범선을 수습하여 이곳 우수영에 당도했다. 이때 왜군들은 2백여척에 수 만 명의 군인을 싣고 울돌목을 통과하여 예성강으로 진출, 이미 직산에 머물러 있던 육군과 합세해 서울을 침범하려는 계획이었으나 일본군에 있어 울돌목 장악은 중요한 과제였다.
임진년 전라수사로 있을 때 부터 울돌목의 지형조건을 파악한 장군은 치밀하게 준비해 나갔다.
쇠사슬 두줄을 안목과 밖목에 건너 매 올렸다 내렸다 할 수 있도록 울돌목에 장치해 두고 장수들을 불렀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하였고 또 한사람이 길을 막으면 천사람을 두렵게 할 수 있다 하였으니 이것은 지금의 우리를 이름이라. 공들은 살 생각을 말고 조금도 명령을 어기지 말라' '나라를 위해 죽기로서 싸워라, 만일 조금이라도 영을 어기는 자는 군법을 시행하리라' 하여 임전결의를 다졌다.
1597년 9월 16일 새벽. 드디어 어란포에 머물고 있던 일본수군들이 밀물을 타고 명랑으로 공격해 왔다. 이순신이 13척의 배로 이를 공격하니 왜선이 이순신의 배를 포위하여 격전이 벌어졌으나 장군은 적장 마다시(구루시마미치후사)를 향해 시위를 당겼다. 이때 기다리고 기다렸던 조수가 썰물로 돌아서자 마다시와 기함을 잃은 왜군들은 혼비백산 도망가느라 바빴다.
이때 대파된 왜선은 1백 33척으로 세계해전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대승리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명량대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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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예관광팀 조창배 ☎ 061-530-5140-530
- 2018-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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