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 메뉴 바로가기 사이트이용안내 바로가기



해남 전라우수영
사진크게보기

해남 전라우수영

  • 위치 : 해남군 문내면 남문길 25(서상리 109-1 일원)
  • 문의
찾아오시는 길
빠른길찾기
조선을 구한 요새 해남 전라우수영
해남 전라우수영은 사적 제535호이며 위치는 해남군 문내면 서상리 109-1 일원이다.
조선시대 전라우수영의 설치는 고려말 우왕 3년(1377) 무안 당곶포에 수군처치사영(水軍處置使營)이 설치된 뒤  고종 32년(1895년) 폐쇄까지 약 500여년 동안 우리나라 서남해안을 지켜온 해군기지이다.
전라우수영은  세종22 (1440) 해남 황원곶(현 위치)에 이를 이설,
전라우수영은 세조 11년 (1465)에 수군절도사영으로 승격·개편되었다. 이후 성종 10년(1479) 순천 내례포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설치된 후부터 전라우도 수군절도사영(약칭 전라우수영)이라 칭하게 되었다. 영역은 원문내 남북 길이 10리, 동서 너비 5리이었다. 영성(營城)은 석축 둘레 2,843척, 높이 11척, 여첩 607개, 호지 3개소가 있었다.

『전라우수영지』(1787)에 의하면 영내의 민호는 620호, 수군 장졸의 병력은 1,085명을 보유하였다. 한편 본 영의 관할구역은 시대에 따라 변화가 있었으나 임란 이후부터 한말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나주·영광·함평·무안·영암·해남·진도 등 7관을 속읍으로, 관내의 속진으로는 금갑도·남도포·어란진·고금도·신지도·마도진·목포진·이진진·다경포·법성포·임치진·지도진 ·주도진·금모포·고군산·선산진·흑산도·청산진·가리포 등 19진이었다.

임진왜란 때는 전라우도 연해지역 14관을 관할하였을 만큼 전시에 있어서 본영의 군사적 규모와 역할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 전라우수영의 군비로는 관사로서 내아 제승당 등 26개소의 각종 당청과 중요시설로 선청과 집회소 또는 회의장소로 이용된 12개소의 누정이 있었다. 중요시걸로 선창을 두었는데, 성남문밖에 석축으로 만든 4개소의 항구 시설이었다.
군선으로는 전선 2척·귀선 2척·해골선 ·방골선이 각 1척·병후선 8척 등 모두 17척을 보유, 여기에 사부·화포수·타공·웅고·기라졸 등의 수군을 배치하였다. 수군절도사는 무관 정3품이었다.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본영의 수사 김억추는 통제사 이순신과 더불어 명량대첩 을 거두었는데, 명량은 본영 선창으로부터 불과 5리도 떨어져 있지 않은 급조류의 해협의 천험의 관방을 이룬 곳이다.

우수영의 축성은 설치 위치로는 해안성, 축성재료로는 토성과 석성의 혼합성, 평면형태로 사각형과 원형의 중간형태인 부정형성, 축성방법으로는 편축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성돌의 크기는 일반적으로 아랫쪽은 150㎝ 이상이 되는 것들도 있으나 올라가면서 50㎝에서 30㎝정도로 작아진다.
사진갤러리
  • 성벽.jpg
  • 조감도.jpg
  • ㅋ.jpg
  • 2.jpg
  • 1.jpg

이전

다음

목록보기
만족도 조사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만족하십니까?
해남군 QR코드
담당자
  • 문예관광팀 조창배 ☎ 061-530-5140-530
갱신일자
2018-04-20
공공누리 마크(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