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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강술래 -  이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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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강술래 - 이동주

  • 위치 : 전라남도 해남군 현산면 읍호리(생가)
  • 문의
    문화관광과 문예관광담당: 061-530-5919 / 관광안내: 061- 530-5915 / 061-532-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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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 강강술래  - 이동주
여울에 몰린 은어(銀魚) 떼.
삐비꽃 손들이 둘레를 짜면
달무리이가 비잉 빙 돈다.
가아응, 가아응, 수우워월래애
목을 빼면 설움이 솟고……
백장미 밭에
공작(孔雀)이 취했다.
뛰자 뛰자 뛰어나 보자.
강강술래
뇌누리에 테이프가 감긴다.
얄두 발 상모가 마구 돈다.
달빛이 배이면 술보다 독한 것
기폭(旗幅)이 찢어진다.
갈대가 스러진다.
강강술래
강강술래.
*유적: 강강술래 시비 / 대흥사 주차장

* 이동주생가: 해남군 현산면 읍호리
* 토속적  서정과  정한(情恨한)의 시인  이동주(李東柱 :1920~1979
이동주 선생은 1950년 서정주 추천으로 <문예>지에 정식 등단했고, 시집으로 <혼야>('51),<강강수월래>('55)와 유고시선집 <산조>와 실명소설집 <빛에 싸인 군무> 등을 남겼으며. 그는 '무기교의 상태'에서 잉태되는 시만이 가장 훌륭한 시라면서, 물질문명의 삭막한 이 시대에서 따스한 인정과 농촌의 정서가 배인 남도가락을 시 속에 살리기 위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렸다.
1979년 1월 28일 위암으로 타계한 시인은 주로 한국적 정한에 바탕을 둔 향토적 서정을 노래한 시를 많이 썼습니다. 시비에는 향토적 서정을 노래한 그의 대표적인 시 '강강술래'가 서희환 글씨로 새겨져 있다.
◇이동주는 1920년에 태어났고,1940년 6월 '조광(朝光)'에 시 '귀농(歸農)', '상렬(喪列)' 등을 발표하고, 이어 1950년에는 서정주(徐廷柱)의 추천으로 '문예(文藝)'지에 '황혼(黃昏)', '새댁', '혼야(婚夜)' 등의 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시인의 길로 들어섰다.그의 시집으로는 '네 동무'(합동시집,1946)와 '혼야'(婚夜,1951), '강강술래'(1955), '이동주시집'(1987)이 전해오고 있다.

* 50년대 시인 중에 가장 대표적인 시인으로  심호(心湖) 이동주(李東柱)를 꼽을 수 있다.
그의 대표작인 「강강술래」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그는 향토적인 감각과 서정성을 바탕으로 한국적인 감정과 정서를 그 누구보다도 섬세하게 표현했던 시인이다. 그는 “일생 안주를 못하고”(서정주)’,“문단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방랑객”(김봉호)으로 “대문 밖만 나서면 표표히 떠돌아다니는 바람”(윤재근)같아서‘이삿갓’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또한 그는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에게‘정(情)의 사람’이라고 불려지기도 했지만 그는 “詩밖에 쓸 수 없는 詩人으로 세상에 와서 시를 중심으로 그 중심권에서 모든 것을 확장하고 견인하면서 모든 인생의 총체적 의미를, 그 무게를 시에다 여과시킨 그래서 개인사적 의미를 민족사적 의미로까지 형상화시키는데 성공한 유수한 詩人 중에 한 사람”(류근조)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해방 후 한국문학의 대표 시인 중 한 사람으로 잘 알려진 심호 이동주(李東柱)는 새댁」, 「혼야」, 「강강술래」 등 우리 고유의 가락을 시적 운율로 잡아 미적 체험의 질료가 되도록 한 전통적 서정시의 맥을 있는 작가로 유명하다.
그는 해남군 현산면 읍호리에서 1920년에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5천석의 거부(巨富)로 조부와 백종조(伯從祖)가 참판벼슬을 지내 해남일원에서는 「雨참판」댁으로 불리며 하늘을 찌를듯한 권세와 전설적인 영화를 누려왔다.
당시 그의 생가는 8백여평 부지에 안채 사랑채 행랑채등 대궐같은 기와집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며 가세를 뽐냈으나 부친의 방탕으로 5천석의 재산이 점점 기울다가 그가 열 한두 살 되던 무렵 아주 영락해버렸다고 한다.
그는 이후 공주의 외가에서 유년기를 보내며 1937년 공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 이때부터 순탄치 않은 「가난한 시인」의 생활을 하게 된다. 공주고보를 졸업한 그는 모친이 염소를 팔아 마련해준 7원을 가지고 상경, 삶의 덧없음을 뼈저리게 느끼며 본격적인 문학수업을 하기 위해 1940년 혜화전문(現 동국대 불교과)에 입학한다.
그 시절 이동주 시인은 현미떡팔이, 막노동, 백화점 선전문 작성, 심지어는 賣血까지 해 2년 간 고학을 했다.
일제 강제징용이 있어 중퇴를 한 그는 고향에 내려와 목포시청에 잠시 근무하는데 이때 고향사람들을 위해 직무를 유기하고 징용을 면제시켜주기도 했다.
그는 혜화전문 시절「朝光」에 작품을 이따금 발표하다 해방 이듬해에 4인시집「네동무」를 목포에서 간행했으며, 그는 이때 호남신문 목포주재기자, 문화부차장을 역임하고 1948년 상경, 신사조사(新思潮社)에서 근무하면서 조연현의 소개로 김영랑 서정주를 첫 상면한다. 이를 인연으로 50년 「문예(文藝)」지에 「황혼」「새댁」「혼야」등 작품이 미당 서정주(徐廷柱)의 추천을 받아 등단했다.
미당은 추천사에서 『그의 시의 체온의 방향은 범세계성이나 범인간성이나 그러한 것이 아니다. 그는 먼저 그외 가장 가까운 조선(朝鮮)-그중에도 그와 제일 가까운 향리근처 사람들의 온갖 선미(善美)한 생활감정에 대한 공감과 그 동정으로부터 시작한다』고 적었다.
이후에 발표된 「강강술래」를 비롯하여 「등잔밑」「마을」「고향散見」「흥타령」「散調」등 대부분의 그의 작품들은 고향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래서 그의 시풍을 가리켜 「情恨과 향토성의 미학」으로 분석하는 시인이 많다.
특히 초기작품에서 향토성이 서민적인 한(恨)과 토속적 정서를 토대로 애수 등을 그린 것이 많다. 또 그의 시의 형식의 특징은 여운(餘韻)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그가 「恨과 멋」이라는 글에서 말한 「시인은 번다하게 시를 뇌까릴 필요가 없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의 시는 언어가 극도로 절제돼 사용되면서도 진솔한 바탕 위에 고전적인 여운이 살아있다. 특히 시어의 굴림과 삭힘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그의 많은 시들을 보면, 돌리고 굴리고 되풀이하는 형식이 그저 뜻을 강조한다거나 흥겨운 가락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 민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러한 되풀이가 몸속에 깊숙이 배어져 있는 소리를 시의 세계에까지 끌어올리는 승화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시집으로 『혼야(婚夜)』(1951), 『강강술래』(1959), 시선집에 『산조(散調)』(1979), 유고시집 『산조여록(散調余錄)』과 시선집『이동주시집』(1987) 등이 있으며, 수필집 <그 두려운 영원에서>등 1백여편의 수필과 <문인실명 소설집(文人實名小說集)> 등 50여편의 소설을 발표하였다.

□ 새 댁 - 이동주의 대표작
새댁은 고스란히 말을 잃었다
친정에 가서는 자랑이 꽃처럼 피다도
돌아오면 입 봉(封)하고 나붓이 절만하는 호접(胡蝶)
눈물은 깨물어 옷고름에 접고
웃음일랑 살며시 돌아서서 손등에 배앝는 것
큰기침 뜰에 오르면
공수(拱手)로 잘잘 치마를 끌어
문설주 반만 그림이 되며
세차게 사박스런 작은아씨 앞에도
너그러운 늘 자모(慈母)였다
애정(愛情)은 법으로 묶고
이내 돌아오지 않는 남편에게
궁체(宮體)로 얌전히 상장을 쓰는……
머리가 무릇같이 단정(端正)하던 새댁
지금은 풀어진 은(銀)실을 이고 바늘귀를 헛보시는 어머니
아들은 뜬구름인데도
바라고 바람은 태산(泰山)이라
조용한 임종(臨終)처럼
턱없이 기다리는 새댁

*참고문헌: 해남의 시문학사, 한국문학을 빛낸 해남의 시인들, 해남(한반도의 땅끝을 찾아서), 해남군 문화공보실,
해남군, 1996. 해남(문화유적), 정윤섭, 향지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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