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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건축

정명식가옥
주소황산면 우항길 127-1
문의문화예술과 문화유산팀 : 061-530-5250 / 관광안내:061-532-1330 /061-530-5915  
관광안내  
 

소개

황산면 우항리 에 소재하고 있으며 이참판댁으로 불려지는 이 가옥은 20여년 전에 정명식씨가 구입하여 현재 거처하며 관리하고 있다. 현재 본 가옥에서는 사랑채와 행랑채만이 남아있으나 본래는 안채와 사당등을 고루 갖춘 규모가 큰 훌륭한 반가였다고 한다.
11간 규모의 안채는 약 20년 전에, 그리고 안채 뒷편에 있던 사당는 약 10년전에 각각 없어졌다. 건물의 배치는 가옥 맨 앞에 줄행랑채를 두고 이와 평행되게 그 뒷편으로 사랑채를 축좌미향으로 앉혔다.

*자세히보기
꽃문양 화려한 참판댁 한옥건축 - 정명식 가옥
흔히 이참판댁 이라고 하는 황산면 우항리 정명식(67세)씨 고가를 찾아가면 제일 먼저 마주치는 것이 우람한 솟을대문이다.
참판(종2품)의 집이었으니 그 권세에 비견하여 지었을 터이지만 해남에 남아있는 고가 중에 가장 큰 솟을대문에 해당할 것이다. 이 집은 현재 도지정문화재(민속자료 8호)로 되어 있으며 그동안 보수를 지속적으로 해 솟을대문이 있는 행랑채와 사랑채 그리고 주변의 담이 깨끗이 정비되어 있다.
원래 이 집의 주인은 참판 이재량 이었다. 1730년 인평대군 ‘요’의 4대손이고 이재량의 4대조(祖)인 ‘명석’이 진도로 귀향을 가게 되던 중 풍랑을 만나 이곳 황산면 우항리에 머무르게 된다. 이후 이곳에 터를 잡고 살게 되는데 이재량은 1857년 철종 때 이곳 우항리에서 태어나게 된다. 이재량은 고종황제와는 8촌간이 되기도 한다.
대원군의 등장은 안동김씨의 세도에 눌려 처신을 하지 못했던 이들을 모이게 하고 관직을 박탈당했던 이들이 다시 복원된다. 이재량도 대원군의 천거에 의해 등용되어, 양호선무종사관에 제수 되었다가 남평현감으로 부임한다. 그는 통정대부 등을 거쳐 광무 6년 가을에 품계가 가선대부참판에 오르고 그로부터 3대가 추증 되었다. 그러나 을사년 가을에 사임하고 고향에 낙향하여,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쓴다.
그는 만석에 달하는 재산을 가지고 있었으나 겸손하고 주위에 자선을 잘 베풀었다고 한다. 일제하에서는 전국적인 국채보상운동이 일었을 때 국채보상소를 설립하고 활발한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지금 이 집은 그 원래의 주인대신 정명식씨 가족이 살고 있다. 정명식씨 집안은 이참판댁의 외가이다. 이참판의 친어머니가 정명식씨 집안인 동래정씨이기 때문에 이러한 연유로 이 집을 지난 1968년 무렵에 사서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정명식 고가는 전체적으로 행랑채와 사랑채의 두 공간으로 되어 있다. 사랑채 뒤에 안채와 사당 등의 건물들이 있었는데 6․25직후 모두 허물어졌다. 현재 이곳은 담으로 둘러싸인 채 텃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내부소개

*양반가의 상징 꽃문양 솟을대문과  행랑채
행랑채는 그 집에 기거하며 일을 하고 사는 하인들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솟을 대문의 가운데에는 빼어난 조형미를 느끼게 하는 꽃 문양의 문고리 쇠장석이 붙어있다.
대문을 훨씬 돋보이게 만드는 이 쇠장석은 꽃문양을 예술적으로 형상화 시킬 줄 아는 옛 사람들의 쇠 다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님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대문 뒷면에는 거북모형으로 깎은 빗장거리가 눈에 띈다. 빗장거리는 보통 장수의 의미가 있는 거북모형을 많이 만드는 데 거북의 조각이 살아있는 것처럼 매우 정교해 집안의 위풍을 느껴 볼 수 있다.
정명식 가옥의 행랑채는 솟을대문을 중심으로 길게 양옆으로 늘어져 있는 줄 행랑채다. 대문의 바로 옆은 마굿간이었으며, 그 옆으로 방과 곳간 등의 공간이 이어져있다.

*행랑채 건축
정면 10간, 측면 1간의 본건물은 우측으로부터 4번째 간에 솟을대문간을 낸 맛배지붕의 줄행랑채이다. 평면구성은 솟을대문간 좌측으로는 행랑방과 외양간, 그리고 곡간을 배열하였으며 우측으로는 모두 광으로 꾸몄다.
구조는 막돌초석위에 방주를 세운 3양 구조의 민도리집이나 솟을대문간에만은 기둥머리에 창방(昌枋)이 보내지고 주두가 얹혔으며 창방밑의 인방사이에는 소로를 일정간격으로 배치하였다. 또한 창방과 주심도리(柱心道里)사이에는 조각된 국화무늬가 박혀있고 각종 문양의 장식으로 뚫려져 있는 등 전체적으로 장식화한 느낌을 주며 처마도 겹처마로 꾸몄고 막새기와도 사용하였다.

*남성공간 사랑채
안채가 보통 여자들과 주인을 위한 공간이라면, 사랑채는 그 집안 식구의 남자들을 위한 공간이자 보통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이다. 따라서 그 집의 가장 활동적인 공간이 사랑채라고 할 수 있는데 손님들이 오면 이곳에서 맞이하거나 하룻밤 묵어가기도 하였다.
정명식 고가의 사랑채 앞에 서면 방문 위마다 현판이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현판은 낙관이 우리나라 것이 아닌 것으로 보아 이참판 당시 중국과 관련하여 구한 것을 붙인 것으로 보고 있다.
잘 깎아 만든 섬돌이 놓여있는 사랑채의 맨 오른쪽에는 안채로 통하는 문이 있다. 안채로 들어가는 통로가 따로 없어서인지 사랑채의 맨 오른쪽을 안채로 진입하는 문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곳에는 이참판의 작은댁이었다는 바로 옆집으로 통하는 쪽문도 있어 정문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 문을 통해 쉽게 드나들 수 있게 되어 있다.
사랑채는 팔작지붕으로 이 집의 중심 건물이 되고 있는데 사랑채의 상량문에는 「崇禎紀元後 五回 甲辛未 三月初 七月 丁酉巳時…」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로 보아 1871년에 건립되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정면 7간에 측면으로는 앞으로 퇴를 둔 2간 규모이며 좌측으로부터 부엌, 방, 대청, 방으로 되어 있다.

*사랑채 건축
이 사랑채는 1871년에 건립되어진 팔작지붕의 와가이다. 건축규모는 정면7간에 측면으로는 앞으로 퇴를 둔 2간 규모이며 평면구성의 좌측으로부터 부엌, 방, 대청, 방이 꾸며져 있고 맨 우측 1간은 방으로 꾸미지 않고 안채로의 진입을 위한 중간문으로 계획하여 그 앞쪽에 2짝의 판장문을 달았다. 그리고 중앙의 정면 5간에는 뒤쪽으로 반간(3척폭)을 더 내어 내부공간을 넓게 활용하였다.

전면의 방 출입문에는 2짝의 아자살 미닫이 문을 달았으며 그 덧문으로는 쌍여닫이의 띠살문을 설치하였고 대청에는 4분각의 띠살문을 달아 들쇠에 메어달게 하였다. 가구는 후방 평주와 전방 퇴주사이에 고주를 둘 세우고 대양은 평주와 후면 고주사이에 걸린 보 중앙의 동지주 위까지 연결되어 있는 특이한 가구형태로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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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해남,정윤섭,향지사,1997.해남군의 문화유적,해남군,1986. 해남군의 문화유적길라잡이(김승기), 1986. 해남, 정윤섭 향지사, 1997. 해남군사, 해남의얼, 해남의문화유산, 땅끝해남

문화유산 정보

유형 : 민속자료
지정번호 : 8호
지정일자 : 1986년 2월 7일
시대 : 20세기 초
종류/분류 :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수량면적(보유종별) : 일곽/ 3,550㎡

문화재 정보

문화재 정보 - 종목, 명칭, 분류, 수량/면적, 지정일, 소재지, 시대, 소유자, 관리자의 정보를 제공하는 표
지정일   소재지 황산면 우항길 127-1
명칭 정명식가옥 시대  
유형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  주거건축 소유자  
수량/면적   관리자 문화예술과 문화유산팀 : 061-530-5250 / 관광안내:061-532-1330 /061-530-5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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