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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관동리벅수 관머리는 지금의 화산면 관동마을로 옛날에는 배가 이곳에서 제주도나 중국의 남부로 떠나는 항구였다. 현재 석장승이 마을의 동쪽과 서쪽에 서서 마을을 지키고 있다.
장승과 솟대는 대개 동제신앙과 결부되어 나타난다. 장승은 동제의 하위신(下位神)으로서 주로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잡귀, 잡신을 막는 피사신의 기능과 거리를 표시하는 이정표, 경계를 표시하는 경계표등의 기능을 갖고 있다.

솟대는 형태면에서 장승과는 달리 마을을 수호하는 신간(神竿)으로 신앙시 되는 문화유산인데 그 연원을 단군신화의 신단수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마한의 소도에 이어진다. 또 마을의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기에 마을 앞 입구에 세워 지기도 한다. 장승과 솟대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명칭에서 차이를 보인다.
경기도의 경우는 '장승' 또는 '장신' 충청도는 '수살' 또는 '수살막이' '수살목' 전라남도 경상남도는 '벅수' 제주도는 '우석목' 동으로 불린다. 해남지역의 경우 대개 '장승'으로 불리나 '벅수'라 하는 곳도 있고 솟대의 경우 대개 '짐대'로 부르고 있다.
해남지역에는 사찰장승 2개소 마을장승 2개소, 짐대 4개소로 나타나 있다. 사찰장승인 대둔사 일지암의 경우만 제외하고 나머지 지역은 모두 마을에서 행하는 동제신앙과 결부되어 있다.

마을입구 동구밖 어귀에 2기의 장승이 있다. 마을사람들은 벅수 또는 장성이라고 부르며 매년 음력으로 정월초 이틀이면 당제(천제 또는 원제라 함)를 모시고 있는데 이때 이들 장승에도 제물을 간소하게 진설한다.
뿐만 아니라 당제후에는 마을 서편에 있는 당산나무와 마을 앞 짐대거리의 짐대에도 약간의 제찬을 차려 놓는다. 현재 짐대거리에는 짐대는 없다. 이들 장승이나 점대거리 그리고 당산나무에는 마을 뒷산 중턱에서 지내는 당제에서와 같이 제사절차를 행하는 것이 아니고 당제를 지낸 후에 그곳에 진설했던 제선(祭選)만을 진설할 뿐 제의절차는 약(略)한다.
이와 같이 장승에 대한 제사의식을 벅수제라고 한다. 이 장승은 예전같은 경우 짐대와 마찬가지로 나무로 만들어 세웠으나 잦은 풍우로 훼손되는 귀찮음을 덜기 위해 1984년에 돌로 만들어 세웠다.
동, 서 장승의 방향은 모두 마을을 등지고 남쪽을 향해 있는데 이는 남으로부터 들어오는 재앙을 막아준다는 믿음 때문이다. 화강암을 재료로 하여 만든 이들 장승은 표면을 잘 다듬어 동, 서대장군이라 음각하였고 동방대장군에는 임술(壬戌)(1984) 12월이라 씌여 있다.

마을입구 동편에는 동방대장군이 있다. 규모는 총고 180cm이며, 화강암으로 제작되었다. 예전에는 목장승이었으나, 훼손이 심해지면 새로 제작해야하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1984년 석장승을 제작하여 세워두게 된 것이다. 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저우얼 초하루 밤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마을 뒷산에 있는 산신 제각에서 산신에게 산신제를 지내는데 이때 장승앞에도 간단하게 제물을 진설하고 풍물을 친다.
마을에서 명성마을로 향하는 서편에는 서방대장군이 있다. 규모는 총고 180cm이고, 화강암이다. 예전에는 목장승이었으나 훼손이 심해지면 새로 제작해야하는 번거로움이 있어 1984년 석장승으로 바꾸었다. 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초하루 밤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마을 뒷산에 있는 산신 제각에서 산신에게 산신제를 지내는데 이때 2기의 장승 앞에도 간단하게 제물을 진설하고 풍물을 친다.
참고문헌
  • 해남의 문화유적, 해남문화원, 1995. 우리마을의 풍속, 해남문화원, 1996. 우리마을의 삶과 문화, 해남문화원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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