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모종

  • 작성자 박종백
  • 작성일 2011-05-23
 불자가 아니더라도 우주에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을 존중하고 미물마저도 생명을 중시하며 중생들에게 자비를 설파했던 석가가 이 땅에 온 의미를 되새겨 볼 요량으로 지인과 함께 사찰을 둘러보기 위하여 마산면으로 향했습니다.

 

 오늘처럼 비가 내린 날은 있는 듯 없는 듯 산속 깊숙이 숨어(隱) 있어 찾는 이의 자취(蹟)마저 알 수 없는 은적사(隱蹟寺)가 제격일거라는 판단에서였죠. 절이 자리한 깊은 골짜기의 그윽한 풍경 속에 저녁에 울려 퍼지는 은은한 종소리인 은사모종(隱寺暮鐘)은 최근까지 해남8경으로 꼽혔을 정도였습니다.

 해남 시가지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481m 높이의 금강산 뒤편 중턱에 자리한 아담한 규모의 사찰입니다.  

 

 지금은 해남읍 학동 마을에서 은적사로 가는 임도가 날 정도로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지만 불과 40여 년 전에는 지금의 도로로 가느니 보다는 산을 넘어 가는 편이 오히려 수월했습니다. 길도 험난하기도 했지만 이용할 교통수단도 변변치 못한 탓도 있었으리라 사료됩니다.

 

 중학교 시절 산을 넘어 소풍가서 밤을 따던 기억이 어렴풋이 납니다. 신혼 초 세무서 공채 시험을 준비하느라 절에 기거했던 선친의 뒷바라지를 위해서 옷 보따리와 음식을 머리에 이고 손에 들며 산을 자주 넘으셨다고 자친께서는 말씀하시곤 하죠.

 

 면소재지에서 절을 향해 가다 보니 우측으로 만년지라는 저수지가 나타나 마음을 확 트게 해줬습니다. 봄답지 않고 계속해서 비가 내리기도 했지만 아직은 모내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이라 만수 상태였습니다.

 

 골짜기가 깊고 산세가 아름다운 금강산을 향하여 계속해서 가다보니 평지가 끝이 나고 비탈진 오르막이 시작되었습니다.



 한눈에 봐도 절간임을 알 수 있는 산길 끝 건물에는 일주문은 보이지 않고 커다란 전나무 위에 단지 흰 페인트로 ‘금강산은적사’라는 사찰명이 쓰인 빛바랜 현판이 걸려 있어 이채로웠습니다. 보통의 절에서 볼 수 있는 찬란한 현판과는 너무나 대조적이기 때문이었죠.

 이 절의 소박함을 입구에서부터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산사라지만 커다란 건물에는 누구라도 주눅이 들기 마련인데 한눈에 들어오는 작은 절이라서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었습니다.

   

 산사에 촉촉이 내리는 빗속을 거닐어 초봄이면 봉선화가 아름답게 핀다던 승방인 심검당에 도착했습니다. 감미로운 비자 향에 이끌려 승방 뒤편으로 돌아가니 우물가에서 비자 열매를 씻고 있던 안면 있는 보살이 보시시 미소 짓습니다.

 

 비로전 옆 두 개의 작은 돌탑 중 한 개는 쓰레기를 소각하는데 사용되고 있어 퍽이나 인상 깊었습니다. 경내 한가운데로 비록 폭은 좁지만 제법 깊은 개울이 형성되어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아직은 더위가 심하지 않는데다 비마저 내려서 그런지 시원하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죠. 그러나 어느 교향악보다도 더 청아한 소리는 이내 머릿속에 침투하여 박하 향을 뿌려댔습니다.

   

 석탑 옆에 자리하고 있으며 방문객들이 차를 마시며 휴식을 취하는 활선당 건너 편 산 쪽으로는 평상이 놓여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절간 곳간으로 썼음직한 건물이 자리하고 있어 볼 때마다 왠지 거슬렸는데 말끔히 정리한 후 평상으로 원상 복구되고 나니 한결 자연친화적이었습니다.

 

 평상은 개울 위의 나무로 만든 다리와 잘 어울렸습니다. 산사의 깊은 곳까지 문명의 이기가 판을 치고 있는 세태에 나무다리는 오히려 방문객의 마음에 따뜻한 인간미를 선사했습니다. 높이 솟은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개울을 가로질러 널빤지가 깔려 있었습니다. 대나무를 이용하여 만든 난간이 조금은 떨어져 나갔지만 자연미가 있어 더욱 아름다웠죠.

 

 아담하지만 설화가 있어 신비스런 은적사는 이름하여 금강이라는 산 깊은 곳에 품어져 있어 주변 숲이 넓게 형성되어 있습니다. 전나무와 비자나무가 있고 비로전 주변으로는 남도 특유의 상록수인 동백나무들이 빽빽하게 군집을 이루고 있죠.

 

 혼자라면 더 머물고 싶었지만 일행이 있어 아쉬움 속에 하산했습니다. 언제가 여유가 있을 때 예전처럼 산을 넘어 가지는 못하더라도 임도를 따라 은적사에 가보고 싶습니다. 노을이 짙게 깔린 서산을 바라보면서 산사에 울려 퍼질 저녁 종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에서죠.

첨부파일
공공누리 자유이용허락(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 담당부서 해남군 해남군청 문의전화 061-530-5114
  • 최종수정일 2023-07-05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어느 정도 만족하셨습니까?

만족도 조사